친구 없는 곳에서 친구의 존재 느끼다

9월15일 나헤라에서 산토도 밍고까지 포도밭따라 걷다

by 이철현

물집 생긴 걸 손으로 잡아 뜯었다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물집 터뜨린 곳이 어제부터 아프기 시작하더니 오늘 걷기 시작한지 1시간만에 참기 힘들 정도였다. 아침식사 겸 들른 바에서 커피와 토스트를 주문하고 자리로 돌아오자 이탈리아인 제이콥이 “헤이~ 리"라고 부르며 다가와 “어디 불편하니?”라고 물었다. 제이콥은 이탈리안 무리들 대장격으로 눈이 크고 눈썹이 짙으며 얼굴은 커 이탈리아인이라기보다 터키인을 연상시킨다. 이 친구는 나이 어린 이탈리아 순례객들을 이끌고 다닌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대부 비토 콜레오네(영화 대부에서 말론 브란도 분)이다. 내가 붙였다. 왼쪽 발가락에 물집이 생겼다고 답했더니 이탈리아 무리 중 안나라는 의사가 있으니 불러서 보라고 하겠다고 했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사양했더니 저쪽에서 오스트리아인 하이디가 물집 부위에 붙이라고 치료용 패치를 가져다 주었다.

KakaoTalk_Photo_2021-09-15-18-12-38 002.jpeg 구름 색깔 예술이다.

패치를 받고 자리에 앉아 커피 한잔 마시려니까 폴란드계 캐나다인 에바가 등산화를 벗은채 뒤뚱거리며 오더니 “그 발로는 네 목적지까지 가기 힘드니 7km 못미친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 방을 잡을테니 거기서 묵고 가자"라며 숙소를 예약했다. 그 관심과 정성에 감사해 “에바 사랑해(Ewa! I love you)"라고 답하자 쿨하게 “응 알아(I know)”라고 답하며 아무일 없었다는 듯 뒤돌아 갔다. 야외 자리에 앉은 20여명 순례객들이 우리 대화를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지나자 얼굴만 알고 이름은 생각나지 않은 독일인 여성이 패치를 가져와 나중에 필요할거라며 두고 갔다. 옆 테이블에 앉은 덴마크인이 그 광경을 보고 흐뭇하게 웃고 있어 내가 “모은 사람이 내 물집을 생각한다(Everyone cares for my blister.)라고 말하며 멋쩍게 웃었다.

KakaoTalk_Photo_2021-09-15-18-12-47 004.jpeg 카마노에서 만난 인연들. 오른쪽 첫번째가 에바다.

브라이언은 하루 뒤처졌고 나의 천사 페닐라와 절대미인 레이비는 15km 뒤에 있고 아르투어는 어디간 지도 몰라 이제부터 혼자겠구나 생각했는데 오류였다. 내가 인지하든 못하든 카미노를 함께 걷고 있는 이들은 어느새 서로 안전을 걱정하는 친구들이 되었다. 프랑스인 조안나에게 바늘과 실을 빌려 하이디에게 빌린 라이터로 소득한 다음 바늘로 물집을 터트리고 실을 물집 안으로 넣어 밖으로 조금 빼낸 뒤 가위로 잘라냈다. 그 장면을 보던 영국인 제이크는 신기한듯 가까이 와 쳐다보았다. 그리고 “날마다 배움터구만(Everyday classroom)”이라며 자기 안내에게 말했다. 레이비도 물집이 생겼길래 발을 주면 내가 물집 치료해주겠다고 하니 질겁하며 도망갔다.

KakaoTalk_Photo_2021-09-15-18-12-41 003.jpeg 산토 도밍고 가는 길에서

물집으로 발은 고통스러웠지만 마음은 힐링이 되었다. 전 세계에서 온 사람과 같은 길을 걷는다는 인연으로 서로 안전과 건강을 챙겨주는 친구들을 한꺼번에 20여명은 생긴 듯하다. 이들에게 받는 배려와 호의는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거다. 돌이켜보면 페널라가 햇빛으로 인한 화상으로 다리 뒤가 발갛게 불거질 때 어설픈 스페인어로 지나가는 주민들 잡아가면 약국 어디냐고 묻고 다닌 것은 같은 동기였으리라. 더욱이 페닐라에게는 천사를 별명까지 지어줄 정도였으니 더 각별했다. 이런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 한달 남짓 남았다는게 행복했고 한달밖에 남지 않았다는게 아쉬웠다.

화살.jpeg 카미노 가늘은 화살표가 인도한다.

로그료나부터 나헤라를 거쳐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지대는 질 좋은 포도주로 유명하다. 포도밭이 장관을 이룰 정도로 곳곳에 뻗어있다. 지금은 포도가 익는 계졀이다. 걷다가 지쳐 포도 익는 냄새가 진동하는 포도밭 옆 나무 벤치에 누워 스페인 하늘을 보고 낮잠을 청했다. 햇빛은 구름 뒤에 숨었고 바람은 선선하게 불어 낮잠 청하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그러다 눈 떠보니 30분이 지났다. 서둘러 일어나 다시 길을 잡았다. 포도를 줄기채 잘라 한송이씩 입에 넣으며 걸었다. 이곳 포도는 송이가 작고 잘지만 당도가 높아서 달다. 나무 줄기는 비록 1m 남짓 자라지만 몸을 비틀고 갈라지면서도 꿈틀거리며 억세게 자란다.


그리 지나다가 시루에냐를 지나 산토 도밍고 델 칼사다로 향하는 길에 접어들자 “헉!" 소리가 나왔다. 추수를 마친 밀밭이 누렇게 뻗고 새로 개간한 땅은 짙은 붉은색으로 대조를 이루다가 곳곳에 짙은 푸른색이 눈길을 끄는 푸른 포도밭이 자리한다. 그 평원 너머로는 흐릿한 산들이 잇대어 두르고 산 능선을 따라 그 위에 물에 탄 잉크 같은 구름이 하늘에 뿌려졌다. 밀밭 가운데로는 머리 가르마처럼 길이 뻗고 그 끝에 하늘이 닿았다. 순례객들은 하늘이 닿는 길을 걸어서 넘었다. 물집 탓에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걸음을 수시로 멈추고 하늘과 구름과 산과 밀밭과 포도밭을 봤다. 그리고 하늘에 닿은 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 에바가 예약한 숙소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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