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간 65Km 밀밭길 주파하다

[9/22~23] Itero de la Vega - San Nicolas

by 이철현

9월 22일 새벽 일어나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지체했다가 출발이 아예 늦어질까 양치질도 생략하고 짐만 챙기고 도망치듯 나왔다. 절대미인 레이비와 나의 천사 퍼닐라를 알베르게에 두고 떠났다. 혼자이고 싶었다. 앞으로 이틀간 65Km를 혼자 걸는다. 퍼닐라와 레이비도 더 많은 카미노 친구들을 사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새벽 6시 30분 랜턴까지 켜고 어둠 속 길을 찾아 헤매다 어플 도움을 받고 제 길에 들어섰다. 비 올까 걱정했는데 하늘에 오리온 별자리가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맑았다. 구름 사이로 보름달이 얼굴을 비추다 사라지다 했다. 카미노를 걸으면서 처음으로 밤하늘의 별을 보는 거다.

KakaoTalk_Photo_2021-09-23-19-25-03 001.jpeg 2주만 일찍 출발했다면 활짝 핀 해바라기를 원없이 볼 수 있었을텐데 지금은 모두 시들어 아쉽다.

하늘이 돕나 보다. 2주 넘도록 한 번도 비를 맞지 않았다. 건기다 보니 비가 적은 것도 있지만 가끔 제법 내리는 비도 밤새 내리다 아침에 길을 나서면 그쳤다. 걷다가 맞는 비도 부슬거리다 그쳤다. 다른 순례객들이 피레네 산맥부터 비를 맞으며 생고생했다는 소리를 들은 터라 내 행운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궁금한 터였다. 드디어 내일 비 예보가 있다. 방수 처리된 백팩이지만 가장 안에 내용물이 젖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행운이 계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KakaoTalk_Photo_2021-09-23-19-25-07 002.jpeg 브라이언은 이틀 간격으로 내 뒤에서 쫓아오고 있다.

이틀간 65Km라면 하루 평균 32Km 이상 걸어야 한다. 고관절에 뻑뻑한 통증이 생기고 발가락에 물집 2개가 새로 생겼다. 서둘러 바늘과 실로 터뜨리고 소독했다. 내일 아침에는 훨씬 나아지길 바랄 뿐이다. 발길을 서두른 이유는 두 가지다. 볼 게 없었다. 평원 위에 길게 뻗은 길이 한도 끝도 없이 뻗다가 Carrion de los Condes라는 마을에 닿았다. 마을에 산타 마리아 성당과 산타 클라라 수도원이 있을 정도로 제법 큰 마을이었다. 산타 클라라 수도원 부속 알베르게에서 한국인 민규 씨와 함께 묵었다. 민규 씨와는 부르고스에서 처음 만났다. 나보다 하루 늦게 출발하다 보니 하루 간격으로 내가 거쳐온 길을 걸은 친구다. 먼저 간 길 정보를 카톡으로 알려준 인연으로 낯선 땅에서 만나는 것이다.

KakaoTalk_Photo_2021-09-23-19-25-09 003.jpeg 시들어가는 해바리기 밭 위로 해가 내리고 있다.

민규 씨는 생장에서 함께 출발한 동료 15명과 함께 움직였다. 에어비앤비 숙소를 빌려 함께 자기고 하고 길바닥에서 식사하며 노래도 부른다. 그중 아르헨티나 라우라, 사이프러스인 디미트리, 이탈리아인 다비드와 특히 친했다. 부르고스에서 맥주 한잔 마신 뒤 헤어졌다가 산타 클라라 수도원 알베르게에서 다시 만났다. 친화력이 좋은 친구라 동료들과 좋은 친구들과 아주 잘 지냈다. 포도주 한병 사서 밤늦게 자기 전에 한잔했다. 스페인에서는 아주 질 좋은 와인을 매우 싸게 살 수 있다.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서로에 대해 묻고 카미노에 온 이유를 주고받았다.

KakaoTalk_Photo_2021-09-23-19-25-12 004.jpeg 도로를 따라 이어진 길은 감흥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아르헨티나 라우라가 파스타를 해서 함께 먹고 출발했다. 지루한 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냥 직선으로 난 길을 감흥 없이 걷고 걸었다. 17Km 길이 자로 잰 듯 직선으로 뻗었다. 가끔 보이는 평원도 지나온 메세타 대평원과 비교하면 감동이 덜했다. 대평원에 길들여지다 보니 역치가 높아진 거다. 평화로운 길을 방해하는 것이 있었다. 파리떼가 지겹게 따라와 달라붙었다. 스페인 파리는 사람을 지나치게 좋아한다. 길 따라오면서 순례객들을 끊임없이 괴롭 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했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길인 데다 파리떼가 극성이라 멀리 보이는 숙소에서 라우라, 디미트리, 민규가 반갑게 맞아주니 기뻤다. 평소 하던 대로 빨래부터 하고 물집 치료하고 맥주 한잔했다.

KakaoTalk_Photo_2021-09-23-19-25-15 005.jpeg 지나는 길에 아주 오래된 운하를 만났다.

숙소로 들어오는 길에 왓츠앱을 통해 레이니가 발목을 삐어 붓는 바람에 병원에 갔다는 반갑지 않은 메시지가 날아왔다. 병원에서 치료한 뒤 레옹으로 가서 며칠 쉬고 나서 발목 상태를 보고 다시 걷는 걸 시도하려나보다. 레이비에게 연락해 레옹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약속했다. 그녀가 무사히 카미노를 완주하기를 기원한다. 브라이언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날아왔다. 이틀 간격으로 뒤에서 쫓아오던 브라이언에게 막내딸이 찾아왔다. 미국 미시간에서 비행기를 타고 아버지를 보러 온 것이다. 사진으로 보니 퍼닐라와 너무 비슷했다. 얼핏 보면 쌍둥이 같았다. 참, 희한한 인연이다.


내일은 38Km를 걷는다. 하루 기준으로 가장 멀리 걷는다. 퍼닐라가 왜 그리 멀리 걷느냐고 묻고 너무 무리해 다치는 일 없도록 하라는 염려의 메시지를 보냈다. 퍼닐라는 하루 간격으로 내 바로 뒤에서 쫓아왔다. 가장 건강하게 별 탈없이 걷는 퍼닐라가 기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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