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평원헤매며40km 이상 걷다

9월 24일 San Nicolas - Reilegos

by 이철현

입이 방정이다. 생장에서 걷기 시작해 2주 넘게 비를 맞지 않아 운이 좋다며 떠들어댔다. 아침에 알베르게를 나설 때 부슬비가 내리지만 곧 걷힐 것으로 생각했다. 아니다 다를까 비가 잦아들더니 그쳤다. 스페인에서 행운은 지속되는가 싶었다. 비옷 중 하의를 벗었다. 그 뒤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3시간가량 비를 고스란히 맞았다. 하의가 젖었다. 상의는 비옷을 입고 있어서 젖지 않았다.

KakaoTalk_Photo_2021-09-24-20-41-20 001.jpeg 비 개인 밀밭 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길 위에 자갈을 밟는 소리와 비옷에 비가 닿은 소리가 앙상블을 이루며 걷기의 즐거움을 배가했다. 비 속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눈을 끄는 풍경도 없고 대화를 나눌 카미노 친구도 없다 보니 끊임없이 자신에게로 침잠했다. 다시 회한의 카미노가 시작됐다. 살아온 날들, 그중에서 어이없이 저지른 삶의 오류들이 끊임없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같은 실수나 오류를 범하지 않을까. 여전히 미숙한 처신을 보면 그마저 확신할 수 없다. 빗물이 떨어져 곳곳에 웅덩이를 만드는 길을 한 발 한 발 씹듯이 걸어갔다.

KakaoTalk_Photo_2021-09-24-20-41-25 002.jpeg 산티아고 순례길의 딱 중간인 사하군을 비 맞으며 지났다.

한참 걷다 보니 나와야 할 마을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당초 산 니콜라스 알베르게를 출발할 때 점심을 먹으려 한 마을이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걸은 시간을 감안하면 벌써 나왔어야 했다. 뭔가 잘못됐다. 카미노 닌자 어플을 열었다. GPS 추적하는 메뉴를 열어보니 카미노를 한참 벗어나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카미노로 다시 합류하기 위해 어플이 제시하는 방향으로 한참을 걸었다. 카미노로 되돌아가기까지 철도도 건너고 추수가 끝난 밀밭도 지나야 했다. 최소 3km는 돌아가는 길이다. 헉! 그럼 오늘 40km 넘게 걷는 거다.

KakaoTalk_Photo_2021-09-24-20-41-31 003.jpeg 내 카미노 시스터 레이비. 내일 저녁식사 함께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지 않고 일부 코스만 걷는 순례객들에게 Itero de la Vega부터 Reilegos까지 코스는 건너뛰라고 권하고 싶다. 차가 시속 200km로 달리는 간선도로 옆에 난 길을 한참 동안 걷는 구간이 이어져 감흥이 없다. 오전에는 빗속을 3시간 걸었고 오후에는 한 번도 쉬지 못하고 7시간을 주파해야 했다. 중간에 순례자를 위해 만든 숲 속 테이블 위에서 스트레칭까지 하며 고관절과 발목의 긴장을 풀어가며 걸으며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할 수 있었다. 자신과 이리 많은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니 사고나 성찰이 깊이가 그 모양이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오랜만에 자기와 대화할 수 있어 좋았다.

KakaoTalk_Photo_2021-09-24-20-41-34 004.jpeg 텍사스 소녀 브라이스 홉과 내일 점심식사 함께 한다. 참, 이런 복도 있군,.

알베르게에 도착해 빨래를 마치자 물집 4개를 치료해준 텍사스 걸 브라이스 홉에게 연락이 왔다. 내가 물집을 제대로 치료했는지 그녀는 카미노를 계속 걷고 있다. 이탈리안 무리들과 어울리며 아주 행복하게 카미노를 즐기고 있는 듯하다. 나보다 하루빨리 앞서 걷고 있어 오늘 레옹에 들어갔을 거다. 그녀는 레옹에서 이틀간 묵는다. 나는 내일 레옹에 들어간다. 홉이 나를 보자고 한다. 그래서 내일 저녁에는 카미노 시스터인 네덜란드 출신 레이비와 저녁 식사하기로 했다. 낮에는 엠마 스톤을 닮은 텍사스 소녀와, 저녁에는 북유럽 절대미인과 보내다니 이게 무슨 복인지 모르겠다. 카미노가 주는 축북이리라. 내일은 25km만 걷는다. 날아가듯 도착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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