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고트족의 전략적 거점 레온에 입성하다

[9월 25일] Reliegos - Leon

by 이철현

지난 나흘간 하루 평균 35km를 걷다 보니 고관절과 발목에 무리가 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레니에고스부터 레온까지는 24km에 불과했다. 무리하지 않고 여유 있게 걸었다. 한 시간 걸고 10분간 쉬었다. 쉴 때는 양말까지 벗고 발에 남은 습기를 완전히 제거했다. 그럼에도 짧은 거리를 걸어도 힘들었다. 나흘간 무리한 탓이다. 쉬고 나서 다시 걸으면 더 힘들었다. 그래서 마지막 12km는 쉬지 않고 주파했다. 이제 10km 정도는 쉬지 않고 한 번에 주파할 수 있다.

KakaoTalk_Photo_2021-09-25-19-32-22 003.jpeg 레옹 대성당 앞에서 아르헨티나인 라우라와 함께

오후 2시가량 레온 도심으로 들어왔다. 레온 대성당(catedral)이 있는 곳을 향해 좁은 옛 골목을 거슬러 오르다 보니 숙소가 나왔다. 레온 대성당은 지척이었다. 걸어서 2분 거리에 불과했다. 숙소 3층 창문 너머로 레온 대성당의 고딕식 첨탑이 보였다. 옅은 황토색 석벽이 멋진 곳이다. 2~3층 발코니마다 걸린 화분에 심은 빨간 꽃이 이쁘게 어울렸다. 숙소는 코벤트가든 호스텔이다. 레온 대성당이 지척인 옛 시가지 골목 거리에 있어 3층 창문 너머로 레온 대성당의 첨탑이 고개를 내밀고 빨간 꽃이 핀 발코니에서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

KakaoTalk_Photo_2021-09-25-19-32-27 004.jpeg 레옹 대성당이 지금까지 본 스페인 성당 중 가장 아름다웠다.

체크인을 서둘러 마치고 아르헨티나인 라우라, 사이프러스인 디미트리, 한국인 민과 시내 구경차 나왔다. 고풍스러운 옛 거리를 따라 5분 걷자 레온 대성당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서있었다. 규모는 부르고스 대성당보다 조금 작지만 성당 돌 색깔이 좀 더 밝아 정감이 가고 정문과 성당 벽에 새긴 조각의 섬세함이나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풍기는 세월의 두께가 부르고스 대성당보다 훨씬 멋져 보이게 했다. 민도 부르고스 성당보다 레온 성당이 훨씬 낫다는 말을 반복했다. 성당 부속 건물도 명동성당 부속건물을 연상시킬 만큼 낯익었다. 설립 100년을 맞은 성당 건축물에 걸맞은 세월의 더깨가 고풍스러운 자태와 함께 신비로움을 더했다.

KakaoTalk_Photo_2021-09-25-19-32-33 005.jpeg 지난 나흘간 같은 알베르게에서 함께 묵은 사이프러스인 디미트리. 그리스어,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를 구사한다.

레온은 유서 깊은 도시다. 게르만족 일파인 서고트족과 이슬람교도 무어인이 이베리아 반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전쟁에서 치열하게 다툰 곳이었다. 서고트족이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와 407년 프랑스 툴루즈를 수도로 삼고 피레네 산맥 양쪽을 아우르는 서고트 왕국을 세웠다. 그 뒤 마드리드 근처 톨레도로 수도를 옮기고 번성했다. 7세기 무어인들이 지중해 서쪽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 14km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로 밀고 들어왔다. 무슬림인 무어인들에게 가톨릭교인 서고트족은 북쪽 끝까지 밀려나야 했다.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던 무어인의 진군을 막은 건 북쪽 지방의 추위였다. 추위에 약한 무어인이 진격을 멈추면서 서고트족은 이베리아 북쪽 해안을 따라 간신히 연명할 수 있었다. 무어인들은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우마이야 왕국을 설립했다.

라우라와 함께.jpeg 숙소에서 라우라와 함께 있는 걸 한국인 민이 촬영했다.

가톨릭 잔존세력이 북부 아스투리아스에서 저항하며 전열을 가다듬고 가장 먼저 수복한 도시가 레온이다. 그 뒤 레온은 국토 수복을 위한 가톨릭 세력의 전략 거점이 되었다. 아스투리아스 잔존 세력이 레온을 수복하자마자 레옹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설립했다. 카스티야는 레옹 왕국을 흡수 합병해 연합왕국으로 통합했다. 당시 피레네 산맥 서쪽 기슭과 동부 해안을 따라 아라곤 왕국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발렌시아까지 영토로 삼았고 지중해 너머 동쪽으로는 이탈리아 나폴리아와 시칠리아까지 통치했다. 카스티야 왕국 이사벨 1세가 1492년 아라곤 왕국 페르난도 2세와 결혼하면서 스페인 왕국을 설립했고 스페인은 전성기를 맞았다.

레온에 내리는 장대비를 창문 너무로 보며 하루 일과를 쓰다.

레온 시내 구경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자 소나기가 내렸다. 숙소 3층 창문 너머로 보이는 장대비는 15분가량 무서운 기세로 쏟아졌다. 어제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은 마드리드 출신 스페인에 따르면, 레온부터 산티아고까지 갈리시아 지방은 1년에 300일 비가 온다고 한다. 과장이 없지 않겠지만 여기서부터 순례길이 만만치 않을 듯하다. 제대로 비를 맞지 않고 지난 20일간 순례길을 마친 행운도 이제 끝일 게다. 내일부터 쏟아지는 빗속을 걸어서 하루 30km씩 걸어야 한다. 지나치게 가혹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KakaoTalk_Photo_2021-09-25-19-32-16 002.jpeg 비 오는 레옹 구시가지 거리

네덜란드 소녀 레이비와 재회에 대한 후기는 내일 올리고자 한다. 저녁 8시 30분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이 글을 쓰는 건 1시간 전이다. 그녀와 재회가 기다려진다. 발목의 붓기가 심하지 않길 바란다. 발목 상태가 괜찮다면 내일 함께 레온을 출발해 산티아고로 가려한다. 남은 여정을 함께 한다면 앞으로 유쾌한 순례가 될 게다. 혼자 걷기의 즐거움은 포기해야겠지만. 레이비와 걷기라면 감수할만하다. 이제 순례길도 3분 2까지 왔다. 남은 기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마치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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