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6~27일] Leon부터 레이비와 동행
인연을 지나치게 가벼이 취급했다. 이러저러 관계를 맺은 뒤 조금이라도 수가 틀리면 손절하기 일쑤였다. 세상에 수많은 인연이 있으니 내게 불편한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 버린 인연을 떠오릴 때마다 못내 아쉽다. 관계를 소홀히 하며 살아온 것이 후회막심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내 인생의 실패를 증명하는 듯하다. 뒤늦게 주위의 인연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 관계마다 담긴 그 따스함이 그립나 보다. 관계의 효용을 따지기보다 관계마다 만들어지는 스토리가 소중한 나이가 됐나볻다. 그런 연차로 스페인 카미노에서 만난 네덜란드 소녀 레이비를 돌보며 함께 걷게 됐다.
레이비는 네덜란드에서 온 22세 소녀다. 키 180cm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서구 미인이다. 푸른색과 회색이 섞인 눈동자는 신비롭고 짙은 갈색과 옅은 금색이 섞인 단발머리는 아름답게 찰랑거린다. 요가, 조깅, 배드민턴을 즐기고 채식을 고집해 건강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카미노를 걷는 순례자들도 그녀와 마주치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는 늘 남자들이 꼬인다. 레이비도 자기가 아름답다는 걸 안다.
외모보다 더 빛나는 건 그녀의 지성이다. 학부에서는 정치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문화역사학을 공부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를 자처하고 그린피스 활동가로 일한 적이 있을 정도로 환경 운동에 관심이 많다. 독서량이 풍부하다 보니 나이에 비해 아는 것도 많고 논리도 정연하다. 프란시스 카프카 작품들을 좋아하고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에 대해 나와 토론할 정도로 사회주의에 대해 깊이 안다. 10살부터 비건을 고집할 정도로 동물 애호가이기도 하다. 육식주의자인 캐나다 브라이언과 채식에 대해 논의할 때는 논리의 깊이 상당했다. 22살밖에 되지 않았다는 게 놀랍다. 훗날 네덜란드 첫 여성 총리가 되는 게 꿈이란다.
레이비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 한국에서 온 나이 먹은 친구를 따른다. 자기 아빠와 비슷한 연배라서 그런가. 나흘 전 레이비와 덴마크 소녀 퍼닐라를 알베르게에 남겨 두고 일찍 길을 나선 적이 있다. 혼자 걷고 싶었다. 또 친한 사람들하고만 걸으면 더 많은 이들과 어울리지 못할 듯했다. 나야 충분히 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었지만 레이비와 퍼닐라는 그러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혼자서 하루 평균 35km를 걸었다. 한 번은 길을 잃어버려 40km 이상 걷기도 했다. 그러다 카미노에서 맺은 인연들과 만든 왓츠앱 방에서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올라왔다. 레이비가 발목에 염증이 생겨 걷지 못하게 생겨 레온에 있는 병원으로 택시 타고 이동했다는 거였다. 의사는 발목에 염증이 생겼으니 3일간 걷지 말고 쉬어야 한다는 처방을 내렸다. 레이비는 어쩔 수 없이 레온에서 사흘간 머물러야 했다. 그 사이 나는 꾸준히 걸어 레온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만났다.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이 안타까워 비건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 잔뜩 먹였다.
레이비는 이틀 뒤 다시 걷고 싶다며 함께 걷자고 제안했다. 먼 나라에서 스쳐가는 인연이지만 그 친구의 밝은 미소와 친구로서 내게 보이는 호의가 좋았다. 하지만 함께 걸으려면 레온에 하루 더 묵어야 했다. 대도시에 머물기를 싫어해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다. 레온에 들어온 첫날이 토요일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토요일에 잠을 자지 않는다. 오후 6시부터 새벽 6시까지 밤새 소리 지르고 떠들며 도심을 몰려다닌다. 하필 숙소가 레온 대성당에서 내려오는 구시가지 중심 골목이라 새벽 6시까지 이어지고 괴성과 고성 탓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분들은 주말에 대도시에 들어오지 말기를 권한다. 브로고 뉴, 레온 같은 대도시마다 하필이면 토요일에 들어가는 일정이었다. 알베르게가 구시가지 중앙로에 붙어있는 탓에 밤새도록 고성과 괴성을 들어야 한다. 그 끔찍한 밤을 다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같은 호스텔에 묵은 한국인 민도 그냥 떠나자고 제안했다. 그럴까 하는 마음도 생겼다. 하지만 풀 죽어 있는 어린 소녀를 두고 가는 게 께름칙했다. 할 수 없이 하루 더 묵기로 마음먹었다.
레온 이튿날 레이비와 레온 대성당도 함께 가고 저녁식사도 함께 했다. 같은 네덜란드인 한나가 대성당 옆에 근사한 아파트를 에어비앤로 빌려 그 집에서 요리를 한다며 나를 초대했다. 마침 나의 천사 덴마크인 퍼닐라도 레온에 도착해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한나와 절친한 또 다른 네덜란드인 닝케도 합류했다. 이로 인해 북유럽 여인 4명과 한국 남자 1명이 비건 스타일 저녁식사를 함께 먹었다. 요리는 레이비가 직접 했다. 아보카도를 짓이겨 죽처럼 만들고 토마토, 가지, 양파, 옥수수 등 여러 가지 야채를 잘게 썰었다. 밀반죽으로 만든 둥글고 납작한 빵에 아보카도를 바르고 그 위에 야채를 올린 뒤 빵으로 싸서 먹었다. 스페인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맛있었다. 포도주와 커피까지 얻어 마시고 시내 골목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한 알베르게로 가서 얼른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오전 7시 30분 한나의 아파트에서 커피까지 얻어 마신 뒤 출발했다. 레이비는 스틱을 사용하기를 꺼려했다. 내가 고집부려 내 스틱을 빌려주며 사용할 것을 권했다. 300km는 더 걸어야 하는데 발목의 부기가 가라앉지 않은 상태라 발목에 가는 중량을 최대한 줄여야 했다. 또 약국에서 발목 보호대를 구입해 신꼈다. 발목 부상 이후 첫 걷기라 거리도 20km로 제한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얼음으로 냉찜질도 했다. 내일 아침이 관건이다. 붓기가 가시지 않고 발목 통증이 재발하면 걷기를 포기해야 한다. 늘 밝게 웃던 녀석의 얼굴에 그늘이 보인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하루 10km를 걷더라도 꼭 순례길을 완주하겠단다. 뭔가 해도 크게 할 녀석이라는 느낌이 든다. 내일 아침 발목의 부기가 가라앉길 바란다.
오늘 카미노는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고속도로에 인접한 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풍경도 별로 좋지 않았고 옆에서 시속 300km쯤 달리는 자동차 소음이 거슬렸다. 환경공학을 전공한 이탈리아인 다비드를 만난 게 그나마 행운이다. 기업이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성장하기 위해 환경공학 측면에서 컨설팅하는 일을 한다. 덴마크 코펜하겐과 이탈리아 밀라노를 오가며 일한다고 한다. 이탈리아인 치고는 영어도 잘하고 성격도 밝다. 대화 주제가 맞았는지 레이비도 기분 좋게 대화했다. 함께 걸으면 공통의 주제로 대화하다 보니 레이비가 발목의 불편함을 덜 느끼며 걷는 듯했다.
퍼널라도 도중에 합류했다. 퍼닐라는 숙소에서 1시간 늦게 출발했지만 발 상태가 아주 좋아 빨리 걸어 우리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나, 레이비, 퍼닐라는 레온에서 고작 20km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다비드는 체력이 남아 좀 더 가겠다고 해서 보냈다. 이 친구와는 내일 행선지인 아스토르가에서 다시 보자고 약속했다. 참, 마음에 드는 녀석이다. 내일 꼭 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