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1일] 혼타라스 - 이떼로 델라 베가
혼타라스에서 늦게 출발했다. 아침식사를 느긋하게 즐긴 뒤 평소보다 1시간 늦은 8시30분쯤 알베르게를 나섰다. 폴란드인 도미니카, 그리고 에바와 함께 걸었다. 나중에 벨기에인 클라라까지 합쳐지다보니 엄청 시끌워졌다. 나중에 한국인 김민규와 아르헨티나인 라울라도 합류했다. 7km 걷다보니 산 안톤이라는 폐허가 나왔다. 상당히 유서 깊은 교회가 자리했을 듯한데 어쩐일인지 벽이 무너져 반쯤 폐허가 되어 있었다. 아르헨티나인이 관리인처럼 보이는 이에게 물어보니 그곳은 당시 이단을 모셨던 탓에 주민들에게 공격당해 신자들은 처형되고 교회는 반쯤 철거되었다고 한다. 성 프란치스코를 모시는 교회라고 하는데 뭐가 그리 달라 끔찍한 일을 저절렀는지 모를 일이다.
이곳에서 파는 십자가는 십자 모양이 아니라 알파벳 T자처럼 생겼다. 에바가 하나 사길래 나도 하나 샀다. 사제가 되겠다는 페닐라에게 주는 선물이다. 소변이 급해서 폐허 근처를 서성이다가 숲의 요정처럼 차려입은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동화속 숲의 요정처럼 차려입은 이가 오래된 나무 주위에서 나무를 치료하는 양 섬세하게 움직였다. 이곳을 지키며 수도하는 성직자 같기도 했고 숲의 요정을 자처하는 이상한 이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스페인에는 참 신기한 것도 많은 듯하다. 개성이 강한 살마도 많은 듯하고. 한참 구경하다 숲에서 벗어나 폐허 안에 있는 알베르게 관리인과 함께 걷는 걸 보니 사람은 틀림 없는 듯했다.
시끄럽게 떠드는 아줌마 3명을 뒤로 두고 빨리 걸었다. 카스트로헤리스이 멀리 보였다. 제법 높은 산성 주변에 주택들이 에워싸면서 형성되었다. 4세기 로마시대 지어진 산성을 지나쳐 내리막을 걸어 맞은편 언던을 향해 걸었다. 걸어서 넘기 만만치 않은 언덕을 오르다 뒤를 보니 멀리 카스트로헤리스 산성과 그 마을이 아득하게 보인다. 자전거를 탄 이들이 힘겹게 넘는 언덕 위에 오르니 그 앞으로 지평선이 멀리 보이고 눈에 들어오는 모든 곳에 밀밭과 숲, 헤바라기밭이 가득했다. 그렇게 9.8km나 되는 밀밭 사이 길을 걸었다. 어제 보았던 풍경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끝도 없이 펼쳐진 밀밭 사이 난 길로 한참을 걷다보니 포엔테 피테로에 들어섰다.
다리를 건너 2km 걷다보니 에테로 델라 베가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레이비와 페널라를 보기로 했다. 뒤늦게 독일인 헨리, 그리고 에바가 들어왔다. 이곳은 아주 작은 마을이다. 10분만 돌아다니면 볼만한 곳은 다 본다. 슈퍼마켓이 하나 있는데 우리나라 시골마을에 있는 구멍가게보다 못하다. 새 양말이 필요하서 3시쯤 가게 문을 두들겼더니 잠겨 있었다. 영업하지 않는듯해 돌아서 가려니깐 문을 열렸다. 짜증이 잔뜩 난 주인이 "낮잠(시에스타) 자니까 5시에 다시 올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동네를 돌아다닐 때 주민 한명을 보지 못했다. 스페인은 오후 2~5시 시에스타를 즐기기 위해 가게 문을 닫는다는 걸 깜빡했다.
돌아오니 멀리서 레이비가 들어왔다. 레이비와 한참 잡담하니 에바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였다. 에바가 알베르게에 들어서는 순간 알베르게가 시끌벅적해졌다. 늦게 페닐라까지 도착했다. 하이디는 8km 더 걸어 다른 알베르게에 묵었다. 에바에 시달린 탓인지 혼자 지내길 바란 듯하다. 하긴 웬만해서는 에버와 오래 지내기 쉽지 않다. 워낙 시끄럽다. 자기 혼자 떠들고 다른 사람 말은 경청하지 않는다. 그리고 뭔지 모르지만 항상 바쁘다.
어제 부르고스를 빠져나올 때 미국 미시간에 사는 브래드를 만났다. 부르고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아 동행하면서 함께 길을 찾으며 움직였다. 브래드가 "왜 카미노를 걷냐"라고 물었다. 그니깐 나는 왜 카미노를 걷는걸까? 나는 "자신에 대해 생각할 시간과 여유를 갖고 싶었다. 서울에서는 누군가 만나고 어울리다 보면 자신에게 말을 걸고 그 대답을 듣을 시간과 여유가 없는 듯하다. 그래서 혼자 카미노를 걸으면서 정리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착각이었다. 여기서도 친구도 생기고 새로운 인연이 맺어진다. 역시 혼자 생각할 여유가 없어진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브래드에게 물었다. "너는 왜 카미노를 걷느냐?" 브래드는 "지난해 딸을 잃었다. 충격이 컸다. 혼자 카미노를 걸으면서 자신에게 시간과 공간의 여유를 주고 싶었다. 어쩌보면 너랑 동기와 비슷하다."라고 답했다. 종교적 동기와 달리 자신을 만나기 위해 카미노를 걷는 이들이 많다. 걸어오는 길에 벽면에 한글이 씌여있길래 유심히 봤다. "잊기 위해 여기에 왔는데 여전히 생각이 많아진다."
오늘까지다. 페닐라와 레이비, 그리고 에바와 움직이는게 즐겁다. 낮에 함께 걷고 저녁에 식사하면서 대화하는게 행복하다. 이제 멈춰야 한다. 다시 혼자가 되자. 그러려고 왔다. 스페인에 들어온지도 20일이 지났다. 앞으로 빠르면 2주 늦어도 3주면 카미노도 끝난다. 서울에 돌아갈 때는 뭔가를 담고 가야하지 않을까. 깊은 사려와 마음 다지기가 필요하다. 그냥 순간의 즐거움에 취해 여기까지 온 진짜 이유를 잊지 말자. 내일은 외롭겠지만 혼자 나가자. 최소 2~3일은 오로지 자신과 걷자. 자기를 등한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