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0일] 부르고스서 대평원을 난 꿈같은 길을 지나 혼타나스에 닿다
부르고스에 이틀을 보냈다. 텍사스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사는 홉 브라이스와 하루 보내고 이트달에는 오스트리아인 하이디와 폴란드계 캐나다인 에바 사이에서 잤다. 홉은 발에 물집이 자주 생겨 걷기를 포기하려 했다. 내가 아침마다 물집을 터뜨리고 약을 발라줘도 다른 곳에 다른 물집에 생기니 걷기가 싫은가보다. 부르고스에서 걷기를 중단하고 산 세바스찬에 들러 해변에서 놀다가 포르투갈에 있는 엄마 친구에게 가겠다고 한다. 부르고스에서 영국인들과 마지막 밤을 즐기며 늦게까지 와인을 마신 뒤 숙소로 돌아왔다. 홉은 영국인 3명과 클럽까지 가겠다고 했다. 카미노 마지막 밤을 즐기고 싶나보다. 다음날 자고 있는 홉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하이디와 예바에게로 갔다.
부르고스는 스페인 북부 지방 최대 도시다. 구시가지로 들어오기 전까지 별 감흥이 없었다. 난잡한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그러저라한 모습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구시가지에 들어서자 풍경이 달라졌다. 구시가지 중심에 부르고스 대성당이 고딕 양식의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우뚝 솟아있고 그 앞에 광장, 광장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간 옛 주거지들이 강변까지 이어진다. 대성당 뒤쪽으로는 성채가 자리하고 과거 해자로 쓰였을 거로 보이는 폭이 좁으나 깊은 개천이 구시가지를 에어싸며 흐른다. 크고 작은 성당이 곳곳에 있을만큼 북부 스페인의 거점 도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부르고스 주말 밤은 미쳐날뛴다. 구시가지 골목에는 인파로 넘쳐 앞으로나 나아하기도 힘들다. 팬데믹 이전 크리스마스이브 명동을 떠올리면 된다. 토요일밤을 즐기기 위해 쏟아져 나온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섞이면서 인산인해를 이룬다. 대성당에 잇댄 광장마다 새벽 4시까지 술집이 이어지고 고성과 괴성이 난무한다. 하필 첫날 숙소를 광장 주변에 붙어있는 곳으로 잡는 바람에 잠을 설쳐야 했다.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짐을 챙기고 하이디와 에바에게 갔다. 하이드가 예약한 호스텔에 들어가자마자 잠을 청했다.
하이디는 광장에서 떨어진 호젓한 곳에 방을 예약했다. 현명했다. 하이디가 예약한 방에는 침대가 4개다. 둘이 양쪽 사이드에 있는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둘 사이에 놓인 침대 2개를 독점했다. 이들과 함께 지내면 편하다. 침대 예약할 때 내 침대도 함께 예약하고 밤마다 음식을 사와 부실한 저녁식사를 보충할 수 있다. 아침식사로 먹으라고 따로 챙겨주기도 한다. 또래지만 엄마 같은 이들과 함께 하루를 보냈다. 하이디는 나의 카미노 엄마를 자청한다. 낮에 부르고스를 돌아다니다 나의 카미노 아버지 브라이언과 재회했다. 그의 밝은 미소가 그리웠는데 만나니 너무 기뻤다.
부르고스에는 원래 하룻밤만 묵으려 했다. 그런데 북유럽 절대미인 레이비와 나의 천사 페닐라가 하루 더 남기를 요청했다. 자기들이 가고 있으니 얼굴 보고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청했다. 브라이언도 남기를 종용했다. 그래서 하루 더 남기로 했다. 그래서 카미노 가족이 부르고스에서 재회했다. 나는 쉰이 넘어서 캐나다인 아빠, 오스트리아인 엄마, 덴마크와 네덜란드 누이동생 2명이라는 카미노 가족이 생겼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저녁식사에서 그들과 함께 한다는게 너무 행복했다. 카미노에서 만난 이들도 우리 갖고 만찬에 초대되었다. 모두 15명이 참석했다. 미국, 캐나다, 독일, 영국, 덴마크,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그리고 한국까지 전 세계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웃고 떠뜰었다. 내가 영어로 외국인들을 웃길 수 있다는게 흥미롭다. 내가 재미있는 사람이란다. 최선을 다해 영어로 내 의사를 전달하는데 가끔 그들의 유머 코드를 찌르고 들어가는게 있다고 한다. 헐~ 난 그게 왜 웃기는지 모르겠다. ㅎㅎ
다음날 일찍 부르고스를 떠났다. 하루 더 남는 브라이언을 부르고스에 두고 다른 카미노 가족들은 길을 떠났다. 걷다가 카페에서 쉬고 있는 페닐라를 발견했다. 그리하여 꿈 같은 길을 다시 천사와 걸었다. 걷는 내내 행복했다. 페닐라는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우아하고 기품이 있다. 그와 함께 걸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페닐라는 레이비와 달리 영어를 아주 잘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별 말이 없어도 조용히 걷는게 좋다. 그러다 내리막 길에서 오르뇰료스 델 카미노라는 마을을 발견했다.
저 멀리 높은 언덕이 지평선을 따라 늘어서고 사방으로 끝을 알 수 없는 밀밭이 펼쳐지고 달랑 하나 난 길 끝에 움뿍 들어간 분지에 그림같은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가운데 종탑이 있는 교회가 보이고 엷은 황토색 돌로 쌓은 집들이 앙증맞게 들어섰다. 마을 앞 밀밭 중간에 키 작은 숲이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해바라기 밭이 넓직이 자리한다. 2주만 일찍 왔어도 해바라기가 지천으로 핀 광경을 봤을텐데 지금 해바라기들은 철이 지나 처첨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페닐라는 이곳에서 하루밤 지내겠다고 했다. 혹시 몰라 내가 예약했던 알베르게 침대를 페닐라에게 줬다. 나는 10km 더 간 혼타나스에 묵는다. 역시 하이디가 예약한 곳이다. 하이디와 에바는 오늘 30km를 걷는다. 페닐라에게 작별인사하고 떠나려하는데 레이비가 왓츠앱으로 가지 말고 자기를 기다리라고 했다. 페널리와 점심식사를 함께 하고 순례객들과 맥주 한잔 마시고 나니 늦게 출발한 레이비가 들어왔다. 둘은 내게 더 가지 말고 오르놀료스 델 카미노에 묵으라고 권했다. 저녁에 요리를 할 예정이고 함께 저녁식사를 하자고 했다. 에바가 안된다고 하며 당초 계획대로 10km 더 걸어야 한다고 해서 에바와 함께 떠나야 했다. 길은 나섰지만 내 마음은 그들에게 남아 있었다. ㅎㅎ
그곳에서 혼타나스까지 10km 구간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었다. 천국에 하늘이 있다면 그런 하늘을 가졌을리라. 동서남북 사방으로 밀밭이 끝도 없이 펼쳐지다 지평선을 만나 하늘과 만난다. 구름은 치마폭처럼 줄줄이 늘어서 구름의 융단을 만들고 중간중간 싯푸른 하늘이 고개를 내밀고 하늘에서 오로라 같은 빛의 커튼들이 구름 사이로 쏟아져 내렸다. 그 밀밭에 달라 길 하나 놓여있었다. 러시아 여인 밀리와 그 길을 함께 걸었다. 걷지 못하고 멍 때리고 보다가 이곳에서는 내 모습을 담고 싶어 지나가는 순례객을 세우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엄마가 몽골인이고 아빠가 러시아인인 밀라였다. 밀라는 지금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다. 그 천국의 길을 밀리와 함께 걸었다.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이 길만큼은 꼭 걸을라고 권하고 싶다. 생경하지만 너무 아름다워 감탄만 나오는 길이다.
밀라는 10km 더 간다고 했다. 오늘 하루만 40km를 걷는거다. 대단하다. 그래서 난 혼타나스에 들어와 하이디, 에바와 재회했다. 하이디와 에바는 엄마들로 자식들 잘 키우고 자기 자신을 찾거나 마음의 치유를 위해 카미노에 나선 이들이다. 둘 다 내게 너무 잘한다. 나이는 내 또래다. 하이디는 담배와 커피 없이는 살 수 없는 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커피와 담배부터 찾는다. 폴란드에서 20년 이상 살다가 캐나다로 이민온 에바는 자식 3명 잘 키우고 나서 우울증을 앓다가 신앙을 갖게 되면서 삶을 활력을 되찾았다고 한다. 죽기 전까지 카미노를 최대한 많이 걷는게 소망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