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일] Componaraya - Las Herrerias
10월 첫날 꼼뽀나라야 알베르게에서 밤늦게까지 손병호게임을 즐겼다. 네덜란드인 레이비, 덴마크인 퍼널라, 이탈리아인 다비드, 에스토니아인 라우라에게 손병호게임을 가르쳐주고 걸리는 이에게 포도주 마시기 벌칙을 주며 웃고 떠들었다. 라우라를 제외하고 나머지 4명이 함께 쓰는 방에 모여 카드 게임을 하다 손병호게임으로 종목을 바꾸었다. 나는 "이탈리아 여자와 사귄 남자 접어"라는 질문으로 다비드를 공격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게임을 시작했다. 그런데 게임이 이상하게 전개됐다. 라우라가 "지난 1주일간 섹스하지 않은 사람 접어"라고 질문하면서 게임 분위기가 이상하게 전개됐다. 그뒤 "스리섬해보지 않은 사람 접어" "지난 한달간 자위행위 1번 이상 한 사람 접어" "이 방 멤버와 키스하고 싶은 사람 접어" 등 분위기가 야릇해지는 질문이 이어졌다. 질문마다 손가락을 접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만 언급한다. 게임을 알려준 사람은 난데 자기들이 더 은밀하게 그리고 농도 깊은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2시간 만에 포도주 3병을 비웠다. 더이상 진행했다가는 내일 걷기가 불가능해질 듯해 레이비 제안으로 게임을 중단했다.
새벽 6시30분 일어나 홀로 알베르게를 나왔다. 여행 전문지에 기고할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를 10월8일까지 보내달라는 요청이 왔다. 원고를 작성하고 산티아고 사진를 촬영하려면 10월7일에는 도착해야 한다. 지금 속도라면 제때 도착하기 불가능하다. 레이비 발목이 여전히 부어있고 통증도 남아있어 하루 25km 이상 걷기 어렵다. 남아있는 거리는 대략 200km. 어쩔 수 없이 작별을 고하고 나혼자 새벽 일찍 떠나 하루 35~40km 강행군해야 한다. 그새 정이 들어 헤어지기 힘들었다. 카미노에서 일주일은 다른 곳에서 6개월 이상 만나야 생기는 우정을 쌓는다고 한다. 레이비와 퍼닐라는 카미노 가족 멤버로 여동생처럼 아끼던 이들이라 헤어지기가 서운하기 그지 없었다. 가지말라며 뗑깡부리는 레이비의 발목을 마지막으로 체크하고 홀로 걷기 시작했다.
새벽이고 그믐달이라 하늘에 별들이 선명했다. 서울에서 보지 못했던 별자리들을 하늘에 이고 렌턴을 비춰가며 꽄뽀나라야 마을 벗어났다. 산길로 접어들자 날이 밝아왔다. 산 위에는 별천지가 펼쳐졌다. 구름은 산 허리에 두르고 가을을 준비하는 숲이 짙었다. 길 위에는 밤송이들이 떨어져 깔렸고 길위 꺽이는 곳에는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루었다. 포도밭이 산중턱에 이어지고 소나 양이 무리를 지어 울타리 너머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끝도 없이 펼쳐지던 메세타 평원이 레온을 지나면서 고속도로를 따라 걷는 지루한 길이 이어져 아쉬웠다. 그러더니 어느새 짙은 숱을 옆으로 보면서 오르막과 내리막을 가파르게 오르는 산길이 이어졌다. 아침에 구름은 산 중턱이나 정상 부위에 걸렸다.
35km 떨어진 작은 마을 라스 헤레리아스에 도착했다. 알베르게에 체크인하니 프랑스인 무리가 한가득이었다. 시끄러웠다. 함께 알베르게에 묵으며 잇대어진 침대들을 쓰던 레이비, 퍼닐라, 다비드가 그리웠다. 이제 혼자서 남은 순례길을 완주해야 했다. 이들은 10일 산티아고에 들어온다. 산티아고에서 사흘 이상 머물면 다시 볼 수 있다. 레이비, 다비드, 퍼닐라는 자기들이 도착할 때까지 산티아고에서 기다리고 한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이 나이까지 살다보면 조금 아쉬울 때 헤어지는게 나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는다. 영어 속담에도 있지 않은가. "Leave behind welcome(모두 환영할 때 떠나라)." 사흘 이상 산티아고에서 빈둥대는 것도 싫고 얼릉 포르투갈 포르투로 가고 싶기도 해 그들을 다시 만날지는 모르겠다. 레이비에게는 네덜란드 총리로 취임식할 때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다. 퍼닐라가 성직자가 되어 주관하는 교회 예배에 참석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다비드에게는 다시 이탈리아 밀라노에 가면 연락하겠다고 약속했다.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 가면 만나자고 라우라에게 말했다. 그 모든 인연의 끈을 가냘프게나마 이어갈 것을 기대하고 그들과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