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30일] Rabanal - Riego de Ambros
규모는 작지만 이쁜 마을인 하나날을 아침 일찍 떠났다. 오늘 코스는 아주 멋졌다. 산티아고 순례길 중 가장 고도가 높은 산에 오른다. 가파르지는 않다. 아주 천천히 고도를 높여가는 코스라 걷다보면 어느새 정상에 오른다. 이곳에는 전 세계 사람들이 자기 나라에서 가져온 돌을 아주 키 큰 십자가 주위에 쌓았다. 가볍게 어깨 너머로 던지는 이도 있었고 정상 위에 살포시 올려놓은 이도 있었다. 퍼닐라도 고향에서 가져온 작고 앙증맞은 검은 돌을 내려놓았다. 독일인 바바라는 돌을 내려놓으면서 자기 근심과 변뇌의 일부를 함께 내려놓는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나야 돌을 갖고 가지 않았으니 그 맥락을 알길이 없었다.
혼자서 감동을 적고 있는 퍼닐라에게 독일인 순례객 하나가 다가갔다. 자기가 가진 고민과 번뇌를 다음 글을 낭독하고 불태우려 하는데 퍼닐라에게 증인이 되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 독일인은 퍼닐라가 마음에 들었나보다. 혼자 햇볕을 받으며 일기장을 꺼내 차분히 정상에서 받은 감동을 적는 모습은 퍼널라 특유의 침착함에 더해져 숭고하게 보였으니라. 독일인은 퍼닐라와 함께 돌 무덤 정상에 꽂힌 십자가까지 올라가 함께 기도한 뒤 자기가 써온 글을 읽고 불태웠다. 퍼닐라는 그 모습을 차분히 지켜보았다. 예상치 못한 멋진 광경이 연출됐다.
레이비를 레온까지 데리고 가 병원 치료를 받게 한 독일인 헨리는 레이비를 많이 좋아한다.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핸레는 동독 출신으로 10년 이상 옥살이도 했다고 한다. 그가 레이비에게 남겨놓은 돌을 발견했다. 아주 큰 돌에다 크게 써놓았으니 금방 발견했다. 헨리는 우리보다 사흘 앞서 있다. 돌에는 레이비를 사랑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레이비가 혼자말처럼 말했다. “헨리가 사랑에 빠진 듯하다. 하하하” 누가 레이비를 보고 사랑에 빠지지 않겠는가. 저리 아름다운 친구가 지성미가 넘치고 늘 밝게 웃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데.
정상에서 내리막을 내려오는 길을 위험했다. 정상적인 발목을 가진 이들도 미끌어지기 일쑤였다. 레이비를 내 뒤를 따르게 하며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특히 돌 조각을 밟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미끌어지지 않은 길을 따라 조심스레 내려왔으나 레이비는 발목에 고통을 호소했다. 아니나다를까 발목이 조금 부어올랐다. 좋지 않은 신호다. 얼음물에 냉찜질하고 연고를 발라 마사지했다. 내일 아침 발목 상태를 봐야겠다.
산 정상까지 가는 길은 최고였다. 레온을 떠난 이래 가장 멋진 코스였다. 산 허리를 따라 구불거리며 뻗은 길을 걸으면 산 아래 울창한 숲과 그 속에 자리한 작은 마을 보며 걸었다. 정상에서 돌을 내리는 이벤트를 치른 뒤 내려오는 길은 더 아름다웠다. 파란 하늘과 그 위에 유화 물감처럼 풀어진 구름, 그 아래로 울창한 숲이 산자락까지 이어졌다. 산 허리를 감아 도는 카미노 길은 숲 속으로 뻗어내려다가 동화 속에서나 나올만한 작은 마을이 발 밑으로 나타난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아세보 마을은 아주 이뻤다. 빨간 지붕을 얹은 스페인 마을과 달리 이곳은 검은색 지붕을 얹었다. 산 중턱에 자리한 이쁘장한 마을이다. 이곳에서 하루 묵고 싶다는 기분까지 들었다. 점심을 먹으며 햇빛을 받다보니 하이디가 도착했다. 나흘 전인가 헤어졌는데 다시 만나니 반가웠다. 우리 카미노 가족의 엄마다. 가족의 재상봉이니 모두 좋아했다. 하이디가 먼저 가려고 하니 레이비가 아주 서운해했다. 브라이언까지 합류하면 카미노 가족의 재상봉인데. 브라이언은 오늘 아침 레온을 떠났고 하이디는 우리보다 5km 더 가서 묵는다고 한다. 카미노 가족들은 앞서가니 뒷서거니 하면서 그렇게 카미노를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