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9일] Astorga - Rabanal del Camino
아스토로가를 아침 7시30분에 떠났다. 고속도로를 따라가는 지름길에서 벗어나 샛길을 방향을 틀었다. 지난 며칠간 도로를 따라 무미건조하게 뻗은 길을 걸었다. 재미없는 길이 한동안 지속되는가 싶더니 샛길로 접어들자 다시 스페인 특유의 청명한 하늘과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구름 아래로 뻗은 밀밭과 옥수수밭이 펼쳐졌다. 밭을 다시 일구기 위해 흙을 뒤집어 짙은 갈색의 밭의 속살이 드러나 있기도 했다.
레이비는 발목 붓기가 여전했다. 발목 통증도 남아 있었다. 어제 30km 걸었으니 오늘은 무리하지 않기 위해 20km만 걷기로 했다. 레이비는 키가 큰 탓인지 스틱을 양손에 어색하게 들고 휘청꺼리며 걸었다. 조심스레 걷는 모습이 역력했다. 짧은 거리지만 천천히 걷다보니 8시간에나 걸려 목적지인 하바날 델 카미노에 닿았다. 미리 예약한 알베르게에 체크인했다. 프랑스인 라우라가 먼저 와서 마당 구속에 1인용 텐트를 치고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라우라가 맥주 마시려고 하는데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라우라는 프랑스 리옹 출신이지만 바르셀로나에서 호텔 리셉션에서 호텔리어로서 연수 겸 일하고 있다. 고향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했다. 카미노에서 목 좋은 곳을 골라 알베르게를 운영하는게 어떨까 고민하고 있다. 그녀는 전 세계를 여행하며 사는게 꿈이다. 12kg 무게 가방을 지고 다닌다. 텐트에다 버너까지 갖고 다니다보니 짐이 많다.
라우라는 영어기 서투르다. 의사소통이 어렵다보니 말하기보다 듣는다. 동병상련이다. 나도 영어를 모국어처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하다보니 어떤 주제에 대해서는 웃고 떠드는데 무슨 맥락인지 놓칠 때가 있다. 그러서인지 라우라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끈기있게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조만간 한국과 일본을 방문하고 싶어한다. 왓스앱을 통해 그녀와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한국에 오면 연락하겠단다.
라우라와 맥주 한잔하고 있으니 독일인 바바라와 에스토니아인 라우라가 와인을 들고 나타났다. 그리하여 와인 파티가 시작됐다. 에스토니아인 라우라와 나는 동네 구멍가게에 들러 백포주를 한병씩 샀다. 햇볕이 쏟아지는 알베르게 앞 테이블에 앉아 포주를 마시고 있으니 퍼닐라가 합류했다. 알베르게에 앉아있는 다비드를 불러냈다. 한참 뒤 남자친구와 통화를 마치고 알베르게로 돌아오던 레이니도 앉았다. 합류하는 사람마다 백포도주를 한병씩 사왔다. 그렇게 백포도주 7명을 마시며 떠들고 놀았다.
광장 한가운데 앰프를 들고 키 작은 흑인이 춤 강습을 시작했다. 음악이 흥겹게 흘러나오니 흥이 많은 퍼닐라, 레이니, 에스토리아 라우루가 춤추기에 합류했다. 음주가무가 난무했다. 모두 신났다. 포도주에 취해 춤추며 웃고 떠들다보니 9시를 훌쩍 넘겼다. 내일 아침 걷기를 위해 잠자리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했다.
낮에 샴푸를 사기 위해 구멍가게로 가던 중 골목 구석에 앉아 남자친구와 통화하는 레이비를 발견했다. 레이비가 갑자기 핸드폰을 내게 넘기더니 남자친구와 통화하게 했다. 그는 네덜란드 소설가다. 레이비보다 여섯살 많다. 가족과도 인사를 나눴다고 한다. 10개월 만났다고 한다. 공통관심사가 많고 세심하게 배려하는 모습이 좋다고 한다. 레이니는 남자친구에게 나에 대해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주 친숙하게 전화를 받았다.
“당신 여자친구는 카미노에서 인기가 많다. 아름답고 똘똘하다. 사람이 다 좋아한다. 특히 남자들이 좋아한다. 조심해라. 푸하하하”
“레이비가 아름답다는 거 안다. 남자들이 좋아할거다. 그래도 난 레이니를 신뢰한다. 하하하”
뭐 이런 시답지 않은 대화를 간단히 나누고 전화기를 레이비에게 건넸다.
낮부터 맥주를 마시고 저녁에는 와인을 마시다보니 많이 취했다. 그러다 터무니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레이비와 퍼닐리가 춤추는 모습을 촬영하다가 얕은 계단에 걸려 넘어지면서 오른쪽 엄지 발톱 끝부분이 깨졌다. 자칫 큰 부상으로 이어질뻔했다. 다행히 발톱 앞부분만 깨졌다. 내일부터 술을 마시지 않기로 했다. 이제 3분의 2 왔다. 어이없는 실수로 걷기를 마치면 허망할 듯하다. 아주 즐겁지만 너는 그 흥겨움에 취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