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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7일] 알함브라서 천국의 미를 엿보다

균형, 섬세, 치밀, 조화 갖춘 천상의 예술 작품

by 이철현

카미노 데 프란세스 790km 종착지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라면 안달루시아 여행의 목적지는 알함브라다. 하루 종일 알함브라에 집중했다. 오전 내내 안달루시아 역사를 비롯해 알함브라 관련 지식을 듣고 읽었다. 오후 2시 가이드 투어에 맞춰 알함브라 입구에 도착했다. 가이드 마누엘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프랑스 부부, 이탈리아 커플, 그리고 나 총 다섯 명이 팀이었다. 오전 내내 읽고 들었던 덕인지 마누엘의 설명이 귀에 잘 들어왔다. 알함브라 모형 앞에서 기초 배경지식을 숙지한 뒤 아기 오리들처럼 마누엘 뒤를 따라 움직였다. 40유로나 낸 덕분인지 줄 서지 않고 내부로 바로 들어갔다. 드디어 알함브라를 보게 된 것이다.

벨라탑에서 내려다본 센트로.jpeg 알함브라 궁전 알카사바에서 내려다본 그라나다 도심

알함브라, 그 극치의 아름다움을 뭐라 표현해야 하나.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보니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13세기 이베리아 반도 남부 알 안달루시아 지역에 기억력 좋은 건축가가 있었다. 그는 자기 수명보다 일찍 죽어 천국에 갔다. 저승사자가 실수한 것이다. 하느님이 저승사자를 혼내고 다시 인간 세상으로 내려보냈다. 하느님에게 혼쭐이 나 제정신이 아닌 저승사자는 세상으로 돌아가는 건축가의 기억을 지우는 것을 깜빡한다. 다시 살아난 건축가에게 나사리 왕조의 무하마드 1세가 1238년 그라나다에 왕궁을 세우라고 지시한다. 그는 천국에서 본 건축 예술을 본떠 알함브라 궁전을 지었다.

격자무늬 창과 벽 문양.jpeg 격자 창문과 벽 문양은 섬세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천국에 이르는 8개 중간계를 별자리로 지붕을 얹고 지상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기하학적 문양에다 나무줄기나 열매 같은 형상을 엮었다. 일부 허락된 자들만 이해할 수 있는 비밀 문자(꾸픽체)로 쓰인 시구로 벽을 둘렀다. 석회암 벽마다 손으로 일일이 새긴 치밀하고 섬세한 문양과 시구는 경이로웠다. 나무에 새긴 양 가늘게 겹치기도 하고 휘어져 뻗다가 기묘하게 어우러진다. 17개 대칭 모양의 타일 문양은 원색의 색깔이 선명하게 살아있어 화려함을 더한다.

자매의 방 천장 별.jpeg 자매의 방 천장에 떠 있는 별. 5천kg 건축 자재가 빽빽이 박혀 천상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바닥에는 선을 따라 물이 흐르고 물이 끝나는 곳에는 물의 거울이 직사각형 모양으로 바닥에 누워 탑과 하늘을 담는다. 물이 흐르고 정지하는 정원마다 궁전과 탑은 데칼코마니로 접힌다. 물이 소리 없이 솟아 나오며 연못의 표면에는 잔물결조차 만들지 않고 가장자리 수로를 따라 흘러나간다. 이른바 알베르카라고 일컬어지는 이슬람 특유의 정원 조성 방식이다. 아랍인들은 “신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물만 빼고”라고 할 정도로 물이 늘 숙제다. 왕은 오아시스를 찾아내 백성의 식수와 용수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정원의 메인 테마는 물이 되었다.

분수와 수로.jpeg 헤렐라리페 정원. 이슬람 정원은 늘 물이 흐른다.

헤네랄리페부터 들렀다. 알함브라 궁전 뒤편 멀리 버티고 선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서 끌어온 물을 관리하는 비밀 정원이었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은 해발 3000미터가 넘는 고산으로 산봉우리에는 만년설이 있었다고 한다. 기후변화 탓에 만년설이 녹았지만 지금은 스키장을 운영할 정도로 눈이 풍부하다. 그곳에서 끌어온 물로 알함브라의 식수와 용수를 공급했으니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이라 경계가 심했다. 왕족 일부만 번잡함을 피해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다. 헤레랄리페는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이었다. 예쁜 정원임에 틀림없었지만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헤네렐리페를 둘러본 뒤 알함브라 성 내부로 넘어왔다. 백성들이 살던 주거지 메디나를 지났다. 비단, 무기, 가죽세공, 세라믹 같은 물품을 만드는 공방도 자리한 곳이다. 벽으로 나누어진 집터만 보기 흉하게 노출되었다. 그곳에는 조금 알카사바 방향으로 가다 보니 알함브라와 어울리지 않는 바로크와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이 나왔다. 카를로스 5세 궁전이란다. 가톨릭 군왕이 신혼여행 와서 머물면서 주거와 사무 공간을 넓히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보기 흉하다. 벽은 갓 구워 부풀어 오른 빵을 덧대놓은 것 같고 원과 직사각형 창이 벽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것이 촌동네 놀이동산에서 볼 수 있는 싸구려 비행기 모형 같다. 그 흉물을 지나 알카사바 지구로 갔다.

사자의 파티오.jpeg 살레사리아 기법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자의 파티오

알카사바는 알함브라를 지키던 군대의 주둔지이자 군영이다. 5만 명 넘는 보병은 성 아래 알바이신 지구에서 살았고 지휘관을 비롯해 고위 장병들이 거주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가장 높은 탑인 토레 데 벨라에 올랐다. 알바이신 지구를 비롯해 그라나다 전역이 내려다 보였다. 뒤쪽으로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정상을 구름에 가린 채 버티고 서 있는 모양도 보였다. 특히 알바이신 지구가 아름다웠다. 알함브라와 함께 그라나다를 지켜온 곳이다. 하얀 벽에 색 바른 붉은 기와로 옹기종기 모인 집들이 수수하면서도 정겹게 어울린다.

알함브라 야경.jpeg 산니골라스 전망대에서 본 알함브라의 야경

하이라이트는 나스리 궁전이다. 자매의 궁전에서 바라본 천정의 별을 정신줄 놓고 보았다. 뒤에서 밀고 들어오는 관광객들에게 밀려날 때까지 고개를 제치고 우러러봤다. 밀려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또 봤다. 저거 사람이 만든 거 맞나 싶다. 손으로 하나씩 끼워서 만들었다고 한다. 5천kg 무게의 건축자재가 들여 만들었다고 하니 무너지지 않는 게 놀랍다. 맥수아르 궁전 천장에는 궁극의 천국에 이르는 8단계 세상을 별자리처럼 박았다. 저 세상이 있다면 저리 생겼을 것 같다. 천상에서 가져온 별의 지도가 이럴 게다. 천정에 온갖 문양은 여러 건축 자재를 일정 순서대로 쌓은 뒤 김밥처럼 잘라내 표면을 완성했다고 한다. 이를 알카라베라고 한다.

하늘을 담은 물의 거울.jpeg 이슬람의 정원은 탑과 하늘을 담고 있다.

벽에 새긴 문양을 가/까이서 봤다. 섬세함의 극치다. 돌에 새긴 거 맞나 싶다. 나무에 새겨도 이리 촘촘하고 정밀하기 힘들 듯하다. 정사각형 모양의 방 하나 꾸미려면 족히 수년은 걸렸을게다. 문 상단을 꾸미는 아치형 조각 문양은 레고 블록처럼 엉키고 겹치면서 거꾸로 쌓인 모양이 외계인 우주선 출입문 같다. ‘셀라세리라’라 하는데 이걸 뭐에 비유해야 하나. 지금까지 본 것 중에는 비슷한 것도 없다. 파빌리온이라고 일컫는, 열주 기둥 위에 얹힌 투각의 창은 신비롭다. 아치 위에 구멍이 송송 뚫려 바깥에서는 안을 볼 수 없지만 안에서는 밖을 조망할 수 있다고 한다. 돌에 같은 모양과 패턴의 조밀한 구멍을 뚫어 기가 막힌 모양을 만들어낸 것이다. 전설 속 심해에 사는 거대 수중 생물의 비늘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으니 상상 속에서 비슷한 것을 찾게 된다.

알바이신 지구 전경.jpeg 알함브라와 운명을 함께 해온 알바이신 지구

알함브라 궁전의 하이라이트가 나스리 궁전이라면 나스리 궁전 내 최고는 사자의 파티오다. 파티오 가운데 자리한, 12마리 사자 상이 받치고 있는 분수가 아니다. 그 분수를 둘러싼 갖가지 모양의 아치 기둥들과 파빌리온들이 천상의 조화를 선보이며 그 방을 천국으로 만들어낸다. 사자상의 분수 중심으로 4면에는 각각 방이 하나씩 자리한다. 스테인드 글라스로 된 천장도 있고 나스리 왕조의 역대 왕 8명을 그린 그림이 천장에 그려져 있기도 한다. 이슬람 건축물에서는 보기 드물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가톨릭 세계의 고딕 양식에서 쓰인다. 또 이슬람 경전 코란이 인물이나 동물 형상을 그리는 것을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금한다. 그러다 보니 기하학적 문양이 발달했다. 그런데 이 사자의 파티오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가 그렸을만한 프레스코 천정화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헤렐레리페에서 바라다본 알함브라.jpeg 헤렐레리페에서 바라본 알함브라 궁전

이곳에서 정신줄을 놓다가 카를로스 5세 궁전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따라 나가다 확 깼다. 이게 뭐지 싶었다. 촌스럽고 투박하고 천박한 건물 내부가 느닷없이 나타났다. 가톨릭 세력이 알함브라 궁전을 접수한 뒤 제멋대로 증축한 곳이다. 그냥 휙 하고 지나갔다. 천상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작품을 이 따위로 덧칠해도 되나 싶다. 가톨릭 세력은 지난 수백 년간 안달루시아 지방에 남은 이슬람 건축 예술을 이 따위로 망가뜨려왔다. 미슐랭 3스타 맛집에서 최고 성찬을 먹은 뒤 디저트 맛이 형편없는 요리를 먹은 느낌이 들었다. 개운치 않은 뒷맛을 없애기 위해 알바이신 골목으로 들어갔다.

천상계 담은 천장.jpeg 8단계 천상계를 표현한 천정 양식

알바이신 골목을 천천히 누비고 다녔다. 떼떼리아라고 일컫는 아랍 전통 찻집에 들어가 쟈스만 차를 마셨다. 아랍 음악이 끊이지 않고 테이블마다 물담배 도구가 올라와 있다. 벽에는 알함브라 궁전에서 보았던 아치 문양이 붙어있다. 내가 아랍 취향인가. 나이 오십 넘어 취향을 찾은 건가. 그러나다에서 마지막 밤이다. 40분 동안 알바이신 비탈길을 올라 사크라몬테 언덕에 있는 산미겔 전망대를 다시 찾았다. 은은한 조명에 서있는 알함브라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이제 천국의 모습을 그린다면 알함브라를 떠오를 게다. Hasta luego! Alhambra.(또 보자 알함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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