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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30일] 비오는 세비야에서 마드리드로 입성

세비야 한인민박 집 주인 부부와 새벽 3시까지 위스키로 송별회

by 이철현

10월30일 그라나다에서 세비야로 돌아왔다. 마드리드로 올라가기 전 세비야에서 이틀 체류했다. 세비야는 안달루시아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도시다. 렌페 타고 세비야에 저녁 늦게 도착했다. 구글맵에 의지해 한참 걷다보니 산타크루즈 지구가 나오고 그 너머 히탈라탑이 노란 조명에 빛나고 있었다. 익숙한 것에 대한 반가움을 세비야 대성당을 보고 느끼다니. 반가웅이 가실 때까지 히랄다탑과 세비야대성당 주위를 배회했다. 비가 가늘게 내리기 시작했다.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한인민박집으로 갔다. 지난번 묵었던 곳이다.

KakaoTalk_Photo_2021-10-31-19-43-18 002.jpeg 마드리드에는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드문 일이다. 비 내리는 아토차 역

침대 4개 비치된 큰 방을 혼자 썼다. 푹 잤다. 다음날 하루종일 비가 추적거리며 내렸다. 히랄라탑 옆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며 외고도 쓰고 지나가는 사람도 보며 망중한을 즐겼다. 그리스 여행 계획도 구체적으로 세웠다. 여행 전문지 편집장과 상의해 그리스 특집을 기고하기로 했다. 마드리드에서 며칠 지내며 체력을 비축한 뒤 11월 첫째주 그리스로 넘어갈거다. 모로코행은 포기했다. 모로코로 가는 건 어렵지 않으나 모로코에서 다시 유럽으로 들어오는 일을 장담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럽 내에서 움직이기로 했다. 아테나를 비롯해 그리스 고대 도시들을 돌아다니고 에게해에 떠 있는 섬들을 둘러볼거다.

KakaoTalk_Photo_2021-10-31-19-43-20 003.jpeg 프라도미술관 앞에는 멋진 도심공원이 자리한다. 비 내리는 공원을 걸었다.

한인민박 주인 내외가 밤 늦게 위스치 한잔하자고 제안했다. 자정쯤 부부가 사는 주거공간인 4층에 올라갔다. 내 방은 2층이다. 영상 촬영과 편집을 취미다보니 편집 모니터와 노트북이 큰 책상 위에 배치되었고 그 앞으로 안틱한 인테리아 소품들이 여기저기 걸려있거나 배치되어 있다. 거실 겸 작업실 치고는 제법 멋스럽게 꾸몄다. 남편은 경남 진주 출신으로 고기잡이 배로 먹고 사는 선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노가다부터 트로트 가수, 독립영화 제작, 시민단체 활동가까지 온갖 직업을 전전하다 대한학교인 간디학교에서 영상촬영을 가르쳤다. 부인은 간디학교 미술교사였다. 부부는 결혼한 뒤 스페인에 놀러왔다가 세비야에 반해 눌러앉았다. 세비야대성당에서 도보로 5분 거리 떨어진 도심 한복판에 있는 4층 집을 통째로 빌려 한인민박집을 열었다.

KakaoTalk_Photo_2021-10-31-19-43-23 004.jpeg 시벨레스 광장은 마드리드 시청이 있고 그 맞은편에 스페인 중앙은행도 있어 우리 서울의 시청 앞과 비슷한 느낌이다. 이곳에서 스페인 드라마 <종이의 집>을 촬영했다고 한다.

부푼 꿈을 안고 시작했지만 팬데믹이 닥쳤다. 일년내내 모아두었던 돈을 까먹으며 버텨내고 있다. 부인이 세비야 내 한식당을 열고 수입이 생기고 있다. BTS와 오징어게임 덕분에 한국 음식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식당이 흑자로 전환했다. 남편은 이벤트를 기획안 경험을 이용해 스페인 사람들을 모아 오징어게임에 나오는 한국 게임을 함께 즐기는 마케팅 행사를 벌였다. 낯선 곳에서 힘겹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젊은 부부의 모습이 보기 좋다. 낯선 곳이라도 서로 사랑하고 기댈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정을 붙이고 살 수 있나보다. 과연 세비야에 산다면 나는 누구와 살고 싶을까. 그런 사람이 없다는게 내 문제이자 행복의 근원일게다.

KakaoTalk_Photo_2021-10-31-19-43-28 006.jpeg 비 내리는 알무데나 대성당

새벽 3시까지 위스키 2병을 비운 뒤 술자리를 파했다. 아침에 일어나 어제 밤 해놓은 밥을 먹고 아르마스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버스 값이 30유로라 렌페의 절반도 안돼 버스를 탔는데 4개 도시를 돌아가는 완행버스라 7시간에 걸쳐 버스 안에서 시달려야 했다. 렌페를 탔다면 2시30분만에 올 수 있는 거리인데. 버스에서 내려 한인민박집으로 향했다. 스페인 마드리드 한인회장이 운영하는 민박이다. 도착했더니 투숙객 3명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곳 대학에서 스포츠마케팅을 전공하는 학생은 밥을 올려놓았고 같은 방을 쓰는 환갑 앞둔 분은 포도주 한병을 가져왔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가 발바닥 피부가 다 벗겨져 움직이지 못하다 방 친구가 와 반가운 듯했다. 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여성 한분은 나를 알아봤다. 순례객 그룹 채팅 방에서 내 글을 봤다고 한다.

KakaoTalk_Photo_2021-10-31-19-43-30 008.jpeg 스페인 마드리드 왕궁에는 비오는 날에도 입장을 기다리는 관광객들이 길게 줄 서있다.

각자의 사연을 가진 투숙객 3명과 함께 하얀밥을 콩나물국 곁들여 맛있게 먹었다. 와인도 한병 다 비우고 소주까지 한병 깠다. 서용복씨는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사는 교포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마드리드로 와서 체력을 회복하고 있다. 발바닥 부상도 치유하고 있다. 마가렛은 아들과 함께 기러기 유학길을 떠났다가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다가 못견디고 서울로 돌아온 분이다. 지금은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며 산다. 유연석이란 학생이 기특하다. 축구선수였다가 스포츠마케팅을 공부하고 싶다고 1년전 혼자 스페인에 온 것이다. 곧 성년이 된다. 1년간 이곳 민박 주인께서 가디언 역할을 해주셨는데 이제 성인이 되어 독립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뜻고 굳고 비전도 명확한게 이제 스물살 치고는 상당히 여물었다.

KakaoTalk_Photo_2021-10-31-19-43-34 010.jpeg 마드리드 궁전과 알무데나 사이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마드리드 시내 전경

여행하면서 는게 있다면 경청이다. 친구나 지인과 대화할 때는 내 얘기하느라 바빴는데 여기서는 많은 사람들의 사연을 듣는게 재밌다. 자기 얘기를 하지 않고 남의 말을 듣는게 흥미롭다니 여행은 참 많은 걸 깨닫게 한다. 그리 3시간 남짓 떠들다 샤워하기 위해 일어섰다. 내일은 마드리드 시내를 돌아다닐거다. 저녁에는 민박 주인장이 투숙객들을 저녁식사에 초청했다. 삼겹살을 굽겠단다. 마드리드에서 한국인들과 삼겹살 파티를 벌이다니 비현실적이다. 아무튼 내일 프라도미술관 관람을 마치지마자 숙소로 돌아올거다. 삼겹살 먹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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