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반테스와 엘 그레코의 도시... 타임캡슐에 담긴 중세 스페인의 모습
며칠간 그리스와 모로코 여행 일정을 짜고 항공편, 배편, 숙소 예약하느라 보냈다. 마드리드에 머물면서 프라도 미술관 뒤편 레티로 공원을 오갔다. 스페인에서 탐나는 건 레티로 공원이다. 마드리드 왕궁에 있는 왕가의 보물이나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벨라스케스나 고양의 작품들은 탐나지 않는다.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내 눈으로 보지 않았으니 논외로 한다.
레티로 공원은 마드리드 시내 한복판에 있는 숲 속 공원이다. 여의도공원보다 넓은 부지에 키 큰 나물들이 가득한 숲이 울창하다. 공원 중앙에는 축구장 4개쯤 들어갈만한 넓은 호수가 자리한다. 잘 다듬은 숲길 곳곳에 있는 벤치마다 마드리드 시민들이 자고 웃고 떠든다. 조금 한적한 숲 속 벤치에는 한낮에 거의 포르노를 찍고 있는 연인들도 볼 수 있다. 그 너머로는 축구장, 테니스장, 스쿼시장이 있어 한낮에 운동하는 시민들로 북적인다. 숲 속으로 길게 뻗은 오솔길에는 낙엽수들이 온갖 색으로 치장하며 가을을 맞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레티로 같은 공원이 있다면 참 멋질 듯하다. 용산 미군기지에서 군 복무할 때 숙소(배럭스)가 있는 캠프 코이너부터 근무지(121 후송병원)가 있는 사우스포스트까지 버스를 타야 할 정도로 넓은 곳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곳을 시민공원으로 꾸민다면 참 멋질 듯하다. 서울 시민이 레티로 못지않은 공원을 가질 수 있길 소원한다.
톨레도를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70여 km 떨어진 근교 도시다. 펠리페 2세가 마드리드에 주저 않을 때까지 톨레도는 가톨릭 스페인 왕가의 수도였다. 마드리드라는 뜻이 수원지라는 뜻이다. 톨레도에 들어가는 물을 관리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거다. 톨레도를 중심으로 가톨릭 세력의 영향력이 커지자 펠리페 2세는 행정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겨 가톨릭의 힘을 제어하려 했다. 가톨릭의 중심지라는 위상은 톨레도에 남겨 두었다.
톨레도 버스터미널에서 나와 5분가량 걷자 우뚝 솟은 언덕 위에 성벽으로 둘러싼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도시 중심지 소코도베르 광장까지 오르려면 에스컬레이터 5개를 연속해서 타야 한다. 걸어 오를 수 있지만 30분 이상 성벽에 이웃한 가파른 언덕길을 등산하다시피 해야 소코도베르 광장에 닿을 수 있다. 톨레도라는 도시명이 라티어로 ‘우뚝 솟다'라는 뜻의 톨레돔에서 유래했다고 하니 얼마든 가파른지 가늠할 수 있을게다. 펠리페 2세 왕비도 오르락내리락 가팔라 톨레도를 싫어했다고 한다.
스페인 왕가는 모르겠으나 이곳이 낯선 이방인에게는 타임캡슐에 담긴 중세 스페인의 모습을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옅은 황토색 벽 사이로 비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이어지고 스페인 3대 성당이라는 톨레도 대성당이 느닷없이 나타나 위압적인 덩치를 자랑한다. 유대인 지구에 있는 산토 토메 성당 입구에는 스페인 3대 화가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 전시되어 있다. 세계 3대 성화라는 명화가 동네 성당 입구에 걸려 있는 것이다. 엘 그레코는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으로 본명은 따로 있지만 그냥 그리스 사람으로 불렸다. 그는 톨레도를 사랑해 평생 톨레도에 머물면서 매너리즘 화풍의 명작들을 쏟아냈다. 톨레도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엘 그레코 미술관을 짓고 관광객들에게 개방했다.
톨레도 시민들이 엘 그레코보다 더 좋아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돈키호테> 저자 세르반테스가 주인공이다. 소코르베르 광장에서 아랍 문양의 출입구가 보이는데 그 계단 밑으로 내려가면 세르반테스 동상이 있다. 그 앞으로는 세르반테스 거리가 이어진다. 세르반테스는 세비야 근처에서 태어났으나 톨레도에 머물면서 돈키호테를 썼다. 돈키호테를 ‘라만차의 기사’라고 하는데 라만차는 톨레도가 자리한 평원의 이름이다. 세르반테스는 레판토 해전에 참전했다가 왼손을 다쳐 의가사 제대하고 공직에 있다가 각종 비리를 저지르다 쫓겨나는 등 신산한 삶을 살았다. 뒤늦게 소설을 쓰기 시작해 57세 나이에 돈키호테를 탈고해 대박을 터뜨렸다. 하지만 판권을 싸게 팔아넘겨 그에게 돌아간 돈은 보잘것없었다.
톨레도는 로마가 만든 도시다. 산마르틴 다리는 로마가 타호 강을 넘어 톨레도를 들어오기 위해 설치했다고 한다. 그곳을 서고트 족이 수도로 삼다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온 무슬림이 300년가량 점령했다가 가톨릭 왕국이 간신히 되찾은 곳이다. 그러다 보니 아랍과 가톨릭 건축 양식과 문화가 섞여 있다. 양 세력 사이에서 독자적이면서도 독특한 문화를 형성한 이들이 유대인이다. 그래서 톨레도는 아랍, 가톨릭, 유대 문화가 조화롭게 섞였다. 기품 있는 귀부인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난잡하지 않고 품격을 갖춘 도시다. 그런데 아주 작다. 도시 끝에서 끝까지 도보로 30분이면 갈 수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30분 안에 도착할 수 없을게다. 걷다 보면 눈을 사로잡고 다리를 묶는 운치 있는 경관과 예술 작품들이 가득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