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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현 Nov 26. 2021

사랑하는 이와 숨어 살고 싶은 곳, 아르호바

델파 가는 길에서 만난 산속 마을...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


동화에서 나옴직한 파르나소스 산간 마을

사흘만에 아테네를 빠져 나왔다. 더 머무는게 의미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3시간을 달려 델피에 왔다. 서양인은 그리스어 Δελφοί의 끝 모음 oi를 알파벳 식으로 델포이로 발음한다. 그런데 그리스인은 oi를 단음절 i로 발음한다. 그러니 델포이가 아니라 델피다. 델포이 신탁이 아니라 델피 신탁이다. 델피에는 신탁과 함께 아폴로 신전, 옴팔로스, 아테네 신전의 폐허가 있다. 아폴로 신전이라 하지만 기둥 2~3개 빼고는 성한게 없다. 아폴로 극장이 있지만 그마저도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보고 말아야 한다. 옛날에는 극장 위로 올라가 내려다보는 광경이 좋았다고 한다. 그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출입금지 테입이 처져 있었다. 

델피 신진은 뒤에 서 있는 5개 기둥과 터만 남아있다.

아폴로 신전으로 올라가다보면 계란이 반쯤 땅에 박힌 것 같은 돌덩이가 나온다. 지구 중심지를 알리는 표지판 역할을 한다는 옴파로스다. 그리스어로 옴파로스는 배꼽이란다. 제우스가 땅끝 사방에서 독수리를 날려보니 독수리 4마리가 모인 곳에 돌을 던져 땅의 중심을 표시했다. 제우스가 던진 돌이 옴파로스 란다. 그냥 신화 속 이야기로 치부하면 좋을 것을 꼭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들이 있다. 과거 그리스인은 세상 끝으로 생각한 동서남북 네곳을 선으로 그으면 옴파로스가 있는 곳이 만나는 점이란다. 믿거나 말거나. 그 밑에는 아폴로가 델피를 접수할 때 죽인 피톤의 시체가 묻혀 있다고 한다. 델피의 등기부등본 맨 위에 있는 원소유주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였다. 가이아는 거대한 뱀 모양으로 태어난 아들에게 그곳 경비를 맡겼다. 아폴로는 예언의 신이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경비원 피톤을 활로 쏴죽이고 델피를 접수했다. 

델피 신전에서 산 아래로 5분 내려오면 안테네 신전 유적들이 자리한다

델피가 있는 파르나소스은 기원전 4세기 이전에는 활화산이었다. 산 곳곳에 화산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델피 신탁이 있는 곳에 화산가스가 새어 나왔다. 그곳에서 피티에라는 여사제가 화산가스 마시고 올리브 잎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복채 낸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쳤다. 특히 국가 대사가 있기 전에는 여러 도시국가들이 델피 신탁을 찾아와 물었다. 멀리 이집트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연탄가스, 아니 화산가스에 취해 환각 작용을 돋우는 올리브 생잎을 씹으며 제멋대로 떠드는 여자 말을 듣고 국가 대사를 결정했다고 하니 어이가 없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 연합군이 이긴다고 예언한 곳은 델피 신전이 유일했다고 하니 점꽤가 제법 맞았다보다. 그런데 이도 어이가 없다. 국가가 운명을 걸고 적국과 맞서 싸운다고 하는데 어느 사제가 자국이 전쟁에서 진다고 예언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연탄가스, 아니 화산가스에 취했다고 해도 목숨을 부지하려면 함부로 떠들 수는 없을 듯하다. 


델피 신탁 여사제 관련해 에피소드 하나 더. 마케도니아 왕으로서 당시 초강대국 페르시아를 짓밟고 인도까지 쳐들어간 알렉산더 대왕은 미신을 믿지 않았다. 델피 신탁에 가서 점꽤 한번 들으라고 주위에서 하도 성화를 부리니 알렉산더 대왕은 친히 델피 신탁까지 갔다. 그런데 간큰 여사제가 오늘은 점꽤를 볼 기분이 아니니 다음에 오라고 한거다. 어이가 없던 알렉산더는 여사제 머리채를 잡고 끌고 나와 "당장 점을 볼래, 아니면 죽을래?"라고 협박했다. 그 여사제는 “당신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사람이다"라고 부리나케 내뱉고 목숨을 부지했다. 알렉산더는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라고 말하며 뒤도 돌아가보지 않고 델피를 내려갔다고 한다. 

그리스 북부로 올라가면 무시무시한 암벽들이 거대한 산맥을 따라 줄줄이 이어진다.

그래도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델피 신탁 주변에 복채로 받칠 보물을 보관할 창고까지 두고 수시로 신탁을 들었다고 한다. 델피 신전 근처에는 부서지고 무너진 돌들만이 그곳이 창고였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그나마 아테네 보물창고가 번듯하게 남아있다. 바로 아래로 5분 내려가면 아테네 신전을 비롯해 아고라와 스토아 건물이 있던 폐허가 나온다. 그곳에는 원형 건물의 기둥 2개가 서 있고 여기저기 건축물의 일부였던 돌들이 나뒹굴고 있다. 폐허들은 금방 본다. 설명문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어 과거 모습을 가늠할 뿐이다. 

한눈에 반한 산간 마을, 왜 그리 낯익고 정겨웠는지. 어이 없는 반전이~

그곳에서 볼건 따로 있다. 1860m 파르나소스 산을 비롯해 주변 산악 경관이 기가 막혔다. 돌산이다보니 나무들이 자라지 못한다. 키 작은 잡목들과 인간이 심어 놓은 듯한 올리브 나무들만 눈에 띈다. 산세가 험하다보니 깍아지르는 산들이 겹쳐서 이어지고 산자락에는 너른 평지가 나오고 그곳에는 올리브 나무들이 집단 서식하고 있다. 저 멀리 산 너머로는 코린트 운하를 통해 이오니아해로 이어지는 바다가 자리잡고 있었다. 높이와 깊이가 극단적이다보니 무지막지하게 높이 솟고 산 능선은 가치없이 바닥으로 내리 꽂힌다.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한 경쾌함이 짜릿하다. 더럽고 지저분하고 매연이 가득하고 답답하고 혼잡스러운 아테네 시가지에서 벗어나 신의 걸작을 마주하니 하루라도 빨리 아테네를 빠져나오지 않은걸 후회했다. 

그리 높지 않은 종탑이 정겹다

델피 오는 길에 산비탈길을 따라 집들이 빼곡히 자리잡은 예쁜 마을이 나타났다. 버스 타고 지나는 길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보자마자 마음이 설랬다. 빨간 지붕들이 비탈길 경사따라 잇대어 있고 하얀 벽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암벽이 울퉁불퉁 튀어나온 산악을 배경으로 위태롭게 조성된 마을은 아름다울 뿐만아니라 정겨웠다. 언제가 한번 와본 느낌마저 들었다. 빨간 돔 모양의 교회 지붕 위에는 하얀 십자가 하나가 달랑 서 있고 그 옆에는 그리 높지 않은 종탑이 햇빛을 받고 있었다. 밑으로 내러가는 좁은 골목마다 아련한 러브스토리들이 배어있을 것같았다. 왜 이리 익숙하지? 왜 이리 로맨틱하지? 델피에서 신탁과 신전 취재와 사진 촬영을 마치고 바로 이곳으로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후 4시 델피에서 이곳으로 오는 버스가 있었다. 다시 델피로 돌아가는 막차가 오후 7시40분이라고 하니 충분히 머물 수 있었다. 마을 가운데를 지나는 도로는 버스가 간신히 지날 정도로 좁았다. 그 도로 양옆에는 레스토랑, 카페, 아이스크림 가게, 옷가게, 기념품 상점 등이 올망졸망 붙어서 이어졌다. 델피가 아니라 이곳에서 하루 머물고 싶었다. 델피에 숙소를 정했으니 이곳에서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종탑으로 올라가 빨간 돔 모양의 정교회 건물과 비탈길을 따라 밑으로 다닥다닥 붙은 지붕들을 보았다. 산 속 마을이라서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석양이 마을에 내리기 시작했다. 종탑에서 내려오자마자 미친 놈처럼 골목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돌아다녔다. 더 어두워지면 못볼 것 같았다. 가까이서 보니 하얀 벽 밑에는 핑크 빛이 도는 돌들로 벽 아래를 꾸민 집들이 많았다. 집들 사이에 있는 골목 길은 돌로 퍼즐 맞추듯이 바닥을 깔아 운치가 있었다. 작은 교회 건물들이 곳곳에 나타났다. 골목길 귀퉁이에 있는 작은 교회 앞에는 정성스레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석양이 종탑을 밝게 비추고 있다

사위가 어두워지자 메인 도로로 올라왔다. 그 길 따라 양쪽으로 불을 밝힌 마을은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게 했다. 왜 이리 낭만적이 됐지? 나이 값도 못하고. 그곳에서 마을 맞은편 기간토스처럼 거대한 암벽 산을 감상하며 스테이크를 먹고 미토스 맥주를 마셨다. 테라스로 나와서 석양이 정면으로 비추는 종탑 건물을 넋놓고 봤다. 아무래도 전생에 여기서 살았나보다. 이리 낯익고 친근한거 보면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델피로 돌아가는 버스가 오려면 1시간은 더 남았다.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려 아이스크림도 먹고 부티크숍 같은 곳에서 향이 강한 천연 비누도 샀다. 평소 내게 전혀 어울리지 않은 행동이다. 사랑하는 이가 생기고 어딘가에 은둔하고 살아야 한다면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참, 이곳에서 차로 20분만 가면 페르나소스 정상 부근에 스키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스키복이나 장갑 등을 파는 상점이 여러 있다. 그리스에서 스키라. 전혀 기대하지 않은 전개다. 그런데 대박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옷가게에 들어 주인을 만났는데 이 사람이 한국어로 인사를 하는게 아닌가. 헐~ 여기 한국 사람들 많이 온다는 거다. 특히 팬데믹 전에는 한국인 커플이 많이 왔다고 한다. 왜? 난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곳인데. 옷가게 주인은 옛날에 한국 드라마를 이곳에서 촬영한 적이 있다고 한다.뭐! 얼른 이 마을 이름 ‘아라코바'와 ‘드라마'를 검색했다. 헐~ 태양의 후예 주인공들이 나의 종탑 위에서 키스하는 사진이 턱하니 나왔다. 이 드라마 봤는데. 유투브에 돌아다니는 짤도 많이 봤는데. 그러니 익숙했던거다. 그래서 낯익었던거다. 그래서 로맨틱했던가다. 그래서 정겨웠던거다. 전생은 개뿔. 푸하하하하. 이리 멋진 곳을 촬영지로 고른 스태프가 궁금했다. 그래도 사랑하는 이와 이곳에서 은둔하고 싶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 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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