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란의 위기 속 흥청망청...외채·가계부채 급증
8월26일 터키 이스탄불 최대 번화가 이스티클랄은 인파로 넘쳤다. 터키 최대 명절인 바이람이 한창인데다 주말이다 보니 이스티클랄 서쪽 초입부터 탁심광장까지 쇼핑 나온 터키인들로 가득했다. 오래된 구형 트램만이 20분마다 오르내리는 거리는 8월 햇볕에 인파가 쏟아내는 열기가 더해져 후덥지근했지만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느라 정신없었다. 상점마다 50~70% 할인 행사를 알리는 문구를 내걸었다. 쇼핑객들은 양손에 쇼핑백을 들고 거리를 오르내렸다. 이곳이 세계경제를 뒤흔든 경제 불안의 진원지라고 믿겨지지 않았다.
이곳 경제가 불안하다는 지표는 환전상이 내건 환율 숫자밖에 없었다. 쇼핑가 곳곳에 자리한 환전상은 1달러는 6~6.5 터키리라, 1유로는 6.8~7.3 터키 리라라고 빨간 레온으로 환율을 표시했다. 환전상마다 약간씩 환율이 달랐고 날마다 바뀌는 환율은 실시간으로 반영됐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유로나 달러를 터키 리라로 바꾸며 유리한 환율 때문인지 밝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올해 들어 터키 리라화 가치가 40%가량 폭락했다. 외국 관광객들은 이스탄불 물가에 놀라고 있다. 자국 통화로 환산하면 웬만한 물가가 반토막났기 때문이다. 이스티클랄에 자리한 꽤 고급스런 터키 식당에서 닭 한 마리를 통째로 소금 속에 넣어서 찐 요리(3인분)가 3만 원가량이다. 이 요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7만원이 넘었다고 한다. 이스탄불 시내에 있는 샤넬, 루이뷔통, 버버리 매장 앞에는 싼 값에 명품을 구매하려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달러나 유로로 환산하면 집값도 크게 떨어지고 있다. 터키 리리화 기준으로는 집값이 조금씩 오르지만 원화로 환산하면 연초에 비해 바겐세일 수준이다. 이스탄블 신시가지 지한가르에서 외국인 상대로 부동산 매매나 임대를 중개하는 바르쉬 씨는 “지난해말과 비해해 터키 리라화 가치가 많이 떨어지면서 외국인 투자자가 터키 내 자산을 팔고 나가는 바람에 지한가르 부동산 시장도 악영향을 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미국이 10일 터키에 구금된 앤드류 브런슨 목사를 석방할 것을 요구하면서 터키산 철강와 알루미늄에 대해 추가로 보복관세를 부과하자 터키 리라화는 하루에 10% 이상 곤두박질쳤다. 미국은 3월 초 터키산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 관세를 각각 25%와 10%로 올린 바 있다. 이번에 다시 각각 2배 올렸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미국과 협상을 모색하지 않고 맞대응하고 있다. 터키는 미국산 자동차, 주류, 잎담배 등에 대해 보복 관세를 부과했다. 미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기도 했다. 미국과 터키가 치킨게임을 벌이자 외국인 투자자들은 터키 자산을 팔고 외화를 대거 터키 밖으로 빼고 있다.
미국과 갈등이 환율 불안을 가중시켰지만 환율 폭락의 기저에는 터키 경제의 취약한 펀더멘탈이 자리한다. 외채, 외환보유고, 경장수지 적자, 물가 등 주요 거시경제 지표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맞은 한국 경제와 비슷하다. 외채는 4666억 달러를 넘고 연평균 물가상승률은 16%에 이른다. 경상수지 적자는 560억 달러를 넘어섰고 재정적자도 심각하다. 외채 구성도 최악이다. 1년 안에 만기가 돌아오는 단기외채 비중이 너무 많다. 단기외채는 1222억 달러지만 외환보유고는 1043억 달러에 불과하다. 외채를 더 들여오지 않는 한 지급불능 상태에 빠진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집안에 둔 금을 꺼내 터키 리라화를 바꿔달라고 터키인에게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다. 이 요청에 터키인은 꿈쩍하지 않고 있다. 위기에 둔감한 탓인지 에르도안 대통령에 대한 불신 탓인지 터키인은 소비에 치중하고 있다. 터키 우치사르에서 호텔업에 종사하는 햐샤드 씨는 “에르도안 대통령은 12년간 터키 수상을 지낸 뒤 정치 체제를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 바꾸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농촌에 대거 보조금을 지원하고 시리아 난민을 갖가지 특혜를 주며 터키 시민으로 받아들여 자기 지지층으로 만들었다. 갖가지 건설 프로젝트를 벌여 재정적자와 외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터키인들은 원래 소비성향이 높다. 저축하기보다 하루 벌어 하루 쓰기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집도 은행에서 돈을 빌려 산다. 이 탓에 가계부채가 눈덩이처럼 쌓였다. 은행 대출금리가 17%를 오르내리고 있다. 지금 당장 가계부채발 금융위기가 닥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에 터키 경제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결정타는 가계부채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밖으로는 만기가 도래하는 외채, 내부적으로는 해마다 17% 이자를 물어야하는 가계부채가 터키 경제를 누란의 위기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터키인들은 위기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 리더십에 대한 불신에다 터키인 특유의 높은 소비성향이 더해진 탓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