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끝에서 얻는 깨달음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를 읽고

by 이철현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고 부처로 해탈하는 과정은 연의 연속이었다. 그는 절친 고빈다와 함께 구도의 길을 떠났고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부처 고타마를 만나 스스로 정진하는 게 깨달음에 이르는 길임을 깨우친다. 일생의 연인 카밀라와 농염한 사랑을 만끽했고 카마스바미와 인연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그 물질이 주는 독성에 중독됐고 타락한 자신에서 도망쳐 뱃사공 바수데바를 만났다. 바수데바와 인연은 일상의 삶 속에서 속세의 번뇌를 잃고 마음의 평온을 얻었다. 또 싯다르타는 아들을 키우며 혈연이 가하는 아픔과 허망을 절망했다.


산사에 스스로 갇혀 일체의 정념을 끊고 참선에 정진하는 것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겠는가. 동안거와 하안거를 거쳐 순간의 깨달음을 얻는 고승들이 없지 않다고 들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이와 달랐다. 그는 인간으로서 연들과 엮이면서 사랑하고 타락하고 아프고 일상의 권태와 평온을 느끼는 속세의 하찮은 감정 속에서 진흙 속에서 피는 연꽃 같은 깨달음을 추구했다. 부처 고타마 밑에서 설법을 듣고 참선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다수가 따르는 방법을 거부하고 자기의 일부이다시피한 친구 고빈다도 떼어내고 홀로 고행의 길을 자초했다.

싯다르타는 카밀라와 인연에서 육욕을, 카마스바미와 인연에서 물욕을 맘껏 흡입했다. 카밀라와는 이성간 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극치의 쾌락을 만끽했다. 나름의 인간관계를 통해 축적한 부를 도박과 음주로 탕진하면서 역시 절정의 쾌감을 누렸다. 그 감정의 소진이 헛되지 않았으리라. 그 소진에서 타버린 재 위에서 자신을 일으켰다. 다시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 들어설 때 뒤돌아보지 않을 수 있었다. 충분히 겪었으니 육체적 쾌락과 물질적 풍요가 헛된 것임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강에 닿았다.


강에서 뱃사공 바수데바와 함께 깨달음의 깊이는 더해갔다. 강의 불변에서 마음의 동요를 지웠고 일상의 반복에서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 이제 그가 겪지 못한 인간의 감정은 부모로서 겪는 감정밖에 없었다. 카밀라와 인연의 끝에서 만난 아들 싯다르타의 관계에서 싯다르타는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상태까지 애를 태웠다. 역시 인간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마지막 번뇌마저 불태우고 나서 그는 부처가 되었다. 바수데바마저 깨달음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강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간 뒤 싯다르타는 홀로 해탈했다.


싯다르타가 해탈의 길목에서 만나 부처의 경지에 오른 것을 확인한 계기는 고빈다와 재회였다. 시작과 끝이 만난다는 불교의 세계관을 담은 걸까. 깨달음의 길을 함께 시작한 고빈다를 싯다르타는 깨달음의 끝에서 다시 만났다. 고빈다는 싯다르타가 해탈해 부처로 변태했음을 확인한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동시에 존재했고 삼라만상의 존재와 무존재를 아우르는 절대적 위치에 올랐다.


2년전 여름 느닷없이 홀로 떠나 홋카이도 오타루 운하에 닿았다. 운하를 흐르는 강물을 보며 지나온 삶을 되새겼다. 싯다르타가 강물에 닿아서 깨달음의 답을 찾듯이 나도 강물에 물었다. 싯다르타는 강물의 소리를 듣고 깨달음에 이르렀으니 지천명에 이른 내게도 혹시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에 대한 힌트라도 얻고자 했다. 유감스럽게도 당시 내게 들린 건 중국인 단체 관광객의 소음밖에 없었다. 강물은 침묵했다. 번잡함을 피해 서둘러 강물을 빠져나왔다. 언젠가 희노애락에 지쳐 다시 홀로 길을 떠날 때 다시 강물에 가리라. 나의 바수데바가 기다리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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