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남서부 해안의 대범함, 인간의 야만을 품어 지우다

11월22일(월) 10 코스: 화순 - 모슬포 올레

by 이철현

일요일에는 하루 쉬기로 했다. 여행의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나흘간 여행기도 정리해 브런치에 올려야 했다. 무엇보다 지친 다리를 쉬게할 필요가 있었다. 비는 아침부터 내리다 그쳤다하면서 하루종일 흩날렸고 바람은 거셌다. 출발했더라도 비에 젖어 바람을 맞서가며 생고생했을 듯했다. 제주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나와 신제주로터리 까지 걸어갔다. 신제주로터리 방향으로 걷다보면 호텔, 식당, 상점 등 제법 번화한 거리에 닿았다. 제주도민 원석이에 따르면 서울 강남 같은 곳이라고 한다. 일요일 점심 시간이라 하기 무색하게 썰렁했다. 아들 딸을 거느린 부부가 감자탕집에서 외식하는 것 외에는 사람 구경하기 힘들었다. 코로나 탓이다. 서울 다녀온 제주도민이 코로나 확진자 판정을 받는 바람에 분위기가 쌔하다.


제주 중앙로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제주 버스정보 어플을 통해 대중교통 수단을 활용해 제주 곳곳을 이동하는데 능숙해졌다. 제주버스정보라는 어플을 깔면 노선, 경로, 정류장, 주변 정류소, 버스시간표까지 손쉽게 얻을 수 있어 편리하다. 중앙로에 도착해 카카오맵 안내대로 미용실을 찾아갔다. 머리를 다듬으려고 미용실에 들렀는데 미용사가 제주도민이냐고 묻길래 아니라고 답하자 그럼 나가달라고 했다. 지금 제주도에서는 외지인이라면 머리 자르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KakaoTalk_Photo_2020-11-25-18-58-12.jpeg 제주 올레 코스 10은 한참을 산방산과 함께 걷는다. 처음에는 산방선을 향해, 나중에는 산방선을 뒤로 하고.

제주 중앙로의 번화가 칠성로 초입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칠성로는 패션잡화 상점이 모여 있는 명동 같은 곳인데 오가는 이들이 많지 않아 썰렁했다. 눈팅만 하고 서둘러 스타벅스에 올라가 창가에 자리잡고 아메리카노 마시면서 여행기를 정리했다. 창가에는 가느다란 빗줄기가 끊이지 않고 사선을 그으며 내리다 창가에 빗물을 흘렸다.


낯선 곳에서 맞은 비를 보며 따스한 커피 한잔 마시는 여행객이라. 제법 운치 있을 듯했지만 배가 산만한 임신부 하나가 제법 널찍한 매장 전체가 떠나가도록 큰 목소리로 통화하는 바람에 분위기 개판됐다. 소음의 진원지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곳에는 여대생 하나가 홀로 앉아 전공책을 꺼내놓고 줄치며 읽고 있었다. 그 앞에 앉아 여행기를 쓰다보니 시간 훌쩍 지났다. 그 여학생이 나갈 채비를 하며 움직이길래 고개를 들어 창문 쪽을 봤더니 어두웠다. 그새 4~5시간이 지난 것이다.


다음날 아침일찍 숙소를 나왔다. 컨디션이 좋았다. 아침 8시20분 숙소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니 40분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제주올레 코스 10 출발지 화순금모래해수욕장까지 도보로 10분가량 떨어진 화순환승정류장이다. 이곳에서 800미터를 걸어 환순금모래해변에 왔다. 지금까지 본 다른 해변과 달리 이곳 모래사장은 그리 검지 않고 황토색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금모래 빛은 아니고. 해양경찰선이 정박해 있을 뿐 금모래해변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평범한 해변이했다. 바다 쪽으로 형제섬이 떠 있고 해안 멀리 산방산이 우뚝 솟은 것 말고는 볼게 없었다.

KakaoTalk_Photo_2020-11-25-18-59-23.jpeg 좁은 해안가 숲길을 걷다보면 작고 이쁜 해변이 나온다. 가족과 함께 온 여행객이라면 자녀와 오봇하게 놀고 갈만한 곳이다.

해안 따라 조성한 좁은 숲속 길을 따라 걸었다. 숲이 터지면서 나무 사이로 느닷없이 집 뒷마당 같은 작은 해변이 나왔다. 양 옆은 튀어 나온 바위로 둘러 싸였고 넓지 않은 모래 사장 가운데에는 검은 바위가 턱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 교토의 사찰 정원에서나 볼 수 있는, 인공적으로 꾸민 모래 해안처럼 보였다. 모래사장 앞 쪽으로 파도가 출렁이는 것이 다를 뿐. 작고 아늑한 해안에 홀로 앉아 바다에 떠 있는 형제섬을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바람에 강하니 불어 체온이 떨어지는 게 느껴지자 일어나 다시 걸었다.


모래사장과 해안길을 한참 걷다보니 산방선이 거대하게 다가왔다. 80만년 전에 만들어진 용암덩어리 답게 묵직했다. 산방산은 주상절리 특유의 세로로 길게 쪼개진 암벽을 거칠게 드러내며 위용을 과시했다. 아름답다기보다 멋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남성미 넘치는 산이다. 이 종 모양의 산은 돌레의 모양과 원주 길이가 백록담 둘레와 모양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한라산이 폭발하면서 백록담을 만들고 그 머리가 이쪽까지 날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한라산에서 사냥꾼이 사슴을 쏘겠다고 화살을 날렸는데 그게 빗나가 옥황상제 엉덩이 맞혔다나. 옥황상제가 화가 나서 한라산 머리를 날렸고 그 산 정상이 남부 해안까지 날아가 산방산이 되었다고 한다. 어느 나라에 가든 한번쯤 들었음직한 전설이다.

KakaoTalk_Photo_2020-11-25-18-58-47.jpeg 제주 남서부 해안에 수호신처럼 서있는 산방산. 남성미가 넘쳤다.

산방선이 지나면 코스 10의 하일라이트라 할 수 있는 용머리해안이 나온다. 다른 곳과 달리 이곳은 관람료를 내야한다. 성인기준으로 2000원이다. 돈까지 내고 들어가야할까 고민하다가 언제 다시오겠냐 싶어 관람료를 내고 들어갔다. 우와~ 대박이었다. 멀리서 보면 바다를 향해 쭉 머리를 내민 모양의 평범한 바위 해안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들어가면 아주 멋진 속살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용머리 해안은 3번 폭발한 수중화산체다. 물 속에서 화산이 터져 솟아오른 화산암 덩어리를 바닷물과 바람이 멋지게 조각했다. 화산암을 자를 대고 끌로 가로로 반복해 끍어내 패스츄리 빵처럼 만든 조형물 같았다. 가로로 평행하게 비슷한 간격으로 옅은 색과 짙은 색이 교차하며 파인 암석 표면을 보면 영화 스타워스에서나 나옴직한 타투인 행성의 마을 같았다. 돌 사이나 움푹 파인 곳에 타투인 행성 종족 터스켄이 거적데기 같은 걸 뒤집어 쓰고 나올 것 같은 분위기. 관람료가 아깝지 않았다. 제주도에서 가장 독특하고 근사한 지형이라해서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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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타워스 타투인행성을 연상시키는 기이한 암석이 근사한 용머리해안

한참 걸은 탓인지 배가 고팠다. 길 가에 허름하게 생긴 식당에 들어가 제주 은갈치로 속을 채운 뒤 송악산을 향해 걸었다. 제주에서 불만은 음식이다. 비싼 것 치고는 맛이 없다. 스스로 미식가라기보다 대식가로 부를 정도로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내가 제주에서는 종달리 밥집과 숙소 옆 양고기 빼고는 ‘이거 참 맛있다’고 감탄하고 먹은 음식이 없다. 대식가답게 밥 한공기 더 시켜 먹고 일어나 제주 남부의 비경 송악산을 향해 걸었다.


송악산은 제주도민이 자주 찾는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송악산 역시 화산이 수중에서 세차례 폭발해 형성된 삼중분화구를 가진 화산체다. 산 전체를 해송이 뒤덮고 있어 송악산이라 하나 옛 제주 사람들이 붙였다는 절울이오름이라는 이름이 더 근사하다. 절울이오름은 파도가 소리쳐 우는 산이라는 뜻이다. 산 절벽에 파도가 부딪히면서 내는 소리라는 ‘절울이'이라 말이 멋있다. 송악산 남쪽 허리를 따라 조성된 등산로를 따라 걸으면 왼쪽으로 산방산과 형제섬이 서로를 쳐다보며 마주한 바다 사이로 여객선이 멈춘 듯 건너고 있었다.

KakaoTalk_Photo_2020-11-25-18-58-28.jpeg 제주 해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주상절리

그곳에서 한참 떨어진 곳부터는 유쾌하지 않은 스토리로 가득한 코스가 이어졌다. 자연을 배경으로 불쾌한 스토리를 만드는 주체라면 역시 인간이다. 해안에 연한 20만평 넘는 평야에 일제가 1926년 알뜨르 비행장을 건설했다. 알뜨르는 ‘앞마당'이라는 뜻의 제주 방언이다. 일제는 이곳에 오무라 행군항공기지를 건설해 중국 공중 폭격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곳곳에 비행기를 숨겨둔 콘크리트 방공호들이 음침하게 푸른 밭 사이에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일본은 일제시대 제주시에 정뜨르, 이곳에는 알뜨르 비행장을 건설해 제주도를 비행기지로 삼은 것이다. 올레길 곳곳에 고사포를 설치한 인공 콘크리트 포대가 불쑥불쑥 튀어 나온다. 발걸음을 재촉해 야만의 흔적에서 빠져나왔다.

KakaoTalk_Photo_2020-11-25-18-58-23.jpeg 제주는 열대수와 침엽수가 공존하는 곳이다.

얼마 걷지 않아 육지에서 건너 온 보안군이 한국전쟁 직후 제주도민을 학살해 매몰한 곳이 나왔다. 근거 없이 사상적으로 불온하다고 판단해 가두더니 북한이 밀고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자 200여명 가량을 총으로 쏴 죽이고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유족이 시신을 찾아가려고 하니 총으로 위협해 내쫓았다고 한다. 다시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 치밀어올랐다. 같은 종족을 집단으로 학살해 인간이 얻을 수 있는게 무엇일까. 인간을 죽여야만하는 그 어떤 정의와 이데올로기를 나는 혐오한다. 그 어떤 형태로든 특정 이념적 지향에 빠지는 걸 경계하는 이유다.


제주 토착민들은 외지인에게 배타적이라고 한다. 육지 사람이 마을에 들어와 게스트하우스나 스킨스쿠버 교습소 등 상점을 내려면 어촌계, 청년회 등 지역 단체들이 찾아와 자리세를 낼 것을 요구하며 텃세를 부린다고 한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육지 사람이 제주도민들에게 저지른 반복된 만행을 보면 제주도민들이 육지인들을 싫어할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KakaoTalk_Photo_2020-11-25-18-58-41.jpeg 코스 10 내내 왼쪽에서 동행한 형제섬. 걸을 때마다 모습을 바꿨다.

제주 해안에 남긴 야만의 흔적에서 벗어나 하모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이곳은 멸치가 많이 잡혀 멜케 해안이라 불리운다. 한자어 이름보다 제주 방언이 훨씬 이쁘다. 어색한 한자 이름 대신 제주어로 제주 지명을 바꿨으면 좋겠다. 이곳은 네덜란드 하멜이 표류한 곳이란다. 그래서 ‘하모’ 해수욕장인가. 확인할 수 없어 통과. 이곳에서 해안은 끊기고 육지 쪽으로 코스는 이어졌다.


한참 걷다보니 아주 작은 선창 앞에 예쁜 카페를 발견했다. 아기자기한 작은 포구에 게스트하우스와 카페, 술집이 줄지어 있었다. 카페에 들어가 커피와 애플파이 한 조각을 주문했다. 외국인 여성 여행객 2명도 애플파이를 주문하며 수선스럽게 떠들었다. 커피와 파이를 먹으며 카카오맵을 확인했더니 코스 10 도착지를 지나 코스 11 초입까지 진입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침 일찍 서두른 덕인지 오늘 걷기는 오후 4시에 끝났다. 1시간가량 음악도 듣고 커피를 천천히 음미하다가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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