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목) 2 코스와 3B 코스 광치기 해변 ~ 표선 해비치 해변
제주에 다시 내려온 둘째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숙소에서 나왔다. 오늘은 코스 2와 3을 한꺼번에 돌겠다고 마음먹었다. 코스 2가 15.6km, 코스 3B는 14.6km로 총 30km를 걷는 대장정이다. 내 발이 견뎌낼지 궁금했다. 군대에서 군장 메고 40km 행군한 이래 가장 먼 거리를 걷는 것이리라. 북유럽 4개국 여행에서도 하루 20km가량 걸었다. 걷기는 어느 순간 은근한 충족감과 노골적 행복감을 선사한다. 발로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길을 밟고 다니는 여행은 차를 타고 스쳐가는 관광보다 충실하다. 여행지가 주는 감흥을 자작자작 씹으며 음미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걷기를 좋아한다. 여행 다니다 보면 하루 2만 보 이상 걷기 일쑤다.
거리가 길다 보니 서둘렀다. 오전 8시 제주시 롯데시티호텔 옆 현대오피스텔 숙소 근처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제주시외버스터미널까지 왔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간선버스 211번을 타고 1시간가량 달리니 광치기 해변에 도착했다. 지난달 19일 걸은 1 코스의 도착지다 보니 익숙했다. 왼쪽으로 성산일출봉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백사장은 고운 모래로 가득했다. 바다는 시푸르렀고 하늘은 흰색 구름에 덧댄 엷은 파랑으로 눈부셨다. 저번에 왔을 때와 달랐던 건 바다다. 밀물 때다 보니 광치기 해변 특유의 넓적 바위들이 보이지 않았다. 바다로 흘러들어 간 용암이 바다와 만나 넓게 퍼지며 형성된 검은색 현무암 바위는 광치기 해변의 트레이드마크다. 이 바위들이 바다 물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지난달 19일에 1 코스를 걸어 광치기 해변에 도착한 때는 오후 5시가 넘었다. 썰물 때라 바다가 멀리 물러가 있어 광치기 해변의 검은 넓적 바위들이 멋진 비경을 만들었다. 그 바위들을 타고 걸어 바다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왔었는데.
바다에 나와 여행객에게 귤을 파는 아주머니의 부르는 소리를 뒤로 하고 다음 경유지인 식산봉을 향해 걸었다. 파란 띠와 주황색 띠가 묶인 안내 리본을 따라 걷는데 식산봉이 나오지 않았다. 고려시대 왜구가 침입하자 당시 지방수령이 백성들을 동원해 군량미를 쌓아놓은 것처럼 꾸몄다고 해서 식산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참을 걸었는데 식산봉은커녕 오름 비슷한 것도 나오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인가. 어쩔 수 없이 안내 리본 따라가 한참 걸어갔다. 길을 잃어버렸다. 갑자기 리본이 나오지 않았다. 카카오맵을 열었다. 올레 2코스와 한참 떨어진 곳을 걷고 있었다. 카카오맵 화살표를 따라 걸어 코스 2 라인에 합류했다.
다소 밋밋한 마을 길을 주야장천 걸었다. 나와야 할 오름은 나오지 않았다. 카카오맵이 잘못 알려줄 일은 없을 텐데. 그렇게 한참을 걸었더니 드디어 눈앞에 오름이 나타났다. 거의 2시간 걸었으니 최소한 8km는 걸었을게다. 그런데 광치기 해변에서 식산봉까지 2.6km에 불과하다. 오름 입구에 도착하니 대수산봉이란다. 식산봉을 찾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게다. 이런 한심한. 등산 폴대에 기대어 숲길을 한참 오르니 봉수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곳에 닿았다. 대수산봉 정상에 도착했다. 제주어로는 ‘큰물뫼'다. 역시 한자어보다 제주어가 멋지다.
이곳에 오르면 우도, 성산일출봉, 섭지코지가 줄지어 펼쳐진 제주 동쪽 해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 주변에는 억새들이 바람에 몸을 흔들며 살랑거리고 그 너머로 숲, 그 뒤로 해안, 그리고 바다와 하늘. 돌아보면 제주 내부에 올록볼록 솟아난 오름과 산악이 줄지어 이어진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 비경을 홀로 감상하며 한참 앉아있었다. 잠시 뒤 아저씨 서너 명이 올라오길래 다음 목적지 혼인지로 향했다.
혼인지는 제주 옛 신화의 공간적 배경이다. 먼 옛날 고, 양, 부 3명의 신인이 홀로 살다가 바다 너머 벽량국에서 온 공주 3명과 결혼한 곳이란다. 식장으로 사용한 곳에 연못이 있어 혼인지라고 불렀고 이들이 살림을 차린 신혼방은 바위동굴이었다나. 아무튼 연못도 있고 바위동굴도 있다. 공주 3인이 도착한 온평리 바닷가는 황루알이라 불린다. 공주들이 해변에 닿았을 때 노을이 바다를 황금색으로 물들였다고 한다. 그래서 황노알 또는 황날이라 부른단다. 유감스럽게도 오후 1시쯤 도착한 터라 황금색 노을을 감상할 수 없었다.
온평 바닷가 포구 쪽으로 걷고 있자니 해안선 따라 현무암을 쌓아 올린 검은 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른바 환해장성이다. 몽고에 끝까지 저항하던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패퇴하자 조정은 탐라로 패잔병들이 몰려들까봐 온평부터 신산까지 성을 쌓아 경계했다고 한다. 외적에 맞선 정규군을 조정이 막아서는 형국이라니. 예나 지금이나 조정이 무능하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해안을 따라 제법 길게 늘어선 장성은 조선시대에 왜구를 막는데 유용했다고 하니 뒤늦게 제 구실을 한 셈이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베트남 쌀 국숫집에 들어왔다. 바다를 보면 먹는 쌀국수라. 바람이 심하게 불어 유리 창문 너머로 바람 소리가 요란했다. 베트남 쌀 국숫집이라서 일까. 베트남 여인이 맞이했다. 얼큰한 쌀국수 국물을 들이켜니 속이 찌릿찌릿 거리며 데워졌다. 기온이 그리 낮지는 않았지만 바람이 심하게 부어댄 탓에 온 몸이 얼었다. 베트남 맥주 사이공까지 시켜 마셨다. 따뜻한 국물에 맥주까지 마시니 몸이 나른해지고 늘어졌다. 시간은 오후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과연 코스 3을 완주할 수 있을까. 일단 코스로 접어들면 도착지까지 완주해야 한다. 제주시 숙소로 돌아갈 방법을 모르니 길을 가다 멈추면 오도 가지 못한다. 나른한 기운을 떨치고 다시 바다 바람을 맞으며 길로 나섰다.
해안을 따라 늘어선 장성의 바다 쪽으로 난 바윗길을 생고생하며 오르락내리락했다. 해안을 따라 펼쳐진 현무암 덩어리에 끊임없이 부딪히는 파도의 포말을 지겹도록 보며 돌 덩어리를 밟고 걷고 있자니 “도대체 왜 사서 이 고생하고 있나"라는 의문이 들어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환해장성의 무너진 돌담을 딛고 나아가면서 고난을 자초한 순례자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듯했다. 아닌가. ㅋㅋ
고난의 행군 끝에 오늘의 하이라이트 신풍 신천 바다목장에 도착했다. 신풍리와 신천리 바닷가에 엄청나게 넓은 평야가 펼쳐졌다. 옛날에는 말을 놓아 키웠고 지금은 소를 방목한다고 한다. 목장 앞으로는 시푸른 바다가 드리우고 목초지는 색 바랜 잔디로 끝도 없이 펼쳐졌다. 이곳에 석양이 내렸다. 주황색에 가까운 빛을 배경 삼아 주민들이 감귤 껍질을 널고 있었다. 얼핏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의 실사가 눈앞에 펼쳐진 듯했다. 아름다웠다. 자연이 연출한 색의 향연에 인간의 노동이 곁들여져 멋진 풍경을 완성했다. 넋 놓고 구경하다 보니 해가 지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까지 8.7km 밖에 오지 못했으니 앞으로 6.6km는 더 가야 한다. 잰걸음으로 가지 않으면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을 수 있었다.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사위가 어두워져 풍경이고 뭐고 감상할 것도 없었고 오로지 앞으로 나아갔다. 해안도로를 따라 한참 걷고 있자니 앞에 늑대만한 개 2마리가 길 한가운데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목줄도 없었다. 큰 개 2마리가 아무 제재 없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다. 올레길을 걷다 보면 낯선 이를 보고 짖으며 덤벼드는 개들이 많다. 다행히 목줄에 매여 있어 개에 물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개들은 어디에 매여있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 녀석들이 지금까지 만난 다른 개처럼 짖으며 덤벼든다면 대책 없이 물릴 게 틀림없었다. 시간이 없었지만 카카오맵에 의지해 길을 크게 우회했다. 한참을 돌아 다시 올레길 루트를 찾았을 때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오후 5시 30분이 지나자 랜턴 없이는 걸을 수 없었다. 하필 코스는 깊은 숲 속으로 접어들었다. 랜턴을 켜고 앞만 보고 걸었다. 나무들 사이로 만들어진 어둠으로 몸을 들이밀자니 겁이 났다. 초거대 늑대 이미르의 목구멍 같이 생긴 어둠을 뚫고 지나갔다. 그러다 나무 가지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날짐승이 나무 가지에 앉아있다가 나뭇가지를 박차고 날아오른 것이다. 기겁을 했다. 한참 걸으니 왼쪽으로 고운 모래가 한가득, 넓디넓은 해변이 펼쳐졌다. 썰물로 바다는 한참을 물러났고 그 넓은 곳을 모래 해변이 차지했다. 낮이었다면 멋졌을 게다. 목적지인 표선해비치 해변에 도착한 것이다.
버스시간표를 보니 한 시간 뒤에나 제주시로 돌아가는 버스 편이 있었다. 식당에 들어가 문어라면과 한라산을 시켰다. 쫄깃쫄깃한 문어, 꽃게, 새우, 홍합을 라면에 넣고 끓인 것이다. 해산물이 가득한 라면이라. 별미였다. 한라산 한 병을 마시면서 친구와 통화했다. 이 친구는 요즘 주식투자에 빠져있다. 평소 주식에 관심을 두지 않은 친구였는데 이 녀석마저 주식투자에 대해 묻기 시작하는 걸 보니 시장이 막판까지 온 듯하다. 다음 주중에 주식 80%를 팔아 현금화해야겠다. 지난 6개월 수익률이 120%이니 나쁘지 않다. 더 오를 수 있겠지만 상승 기대폭이 크지 않다. 이쯤에서 빠져나와야겠다. 이 판단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