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1일(토) 18코스 제주원도심 - 조천 올레
아침에 일어나니 다리가 뻣뻣해 하루는 편한 코스를 다녀오고자 했다. 가파도를 한바퀴 도는 10-1 코스는 4.2km로 1~2시간이면 섬 가운데를 관통해 해안을 돌아볼 수 있었다. 상동포구에서 나오면 바로 송악산에 들르고자 했다. 송악산은 숨겨진 비경을 간직하고 있어 제주도민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오늘은 이곳에 가자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출발하기 전에 제주도에 사는 대학원 동기 원석에게 전화가 왔다. 일요일 저녁식사 약속을 하루 당겨 오늘 보자고 했다.
느즈막하게 일어나 아침식사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가 넘었다. 가파도로 가는 배편을 타기 위해서는 상동포구까지 가야 하는데 숙소에서 1시간30분이나 걸린다. 버스만 3시간 타는 셈이다. 포구에서 가파도로 가는 배편을 기다리고 섬에서 돌아다니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약속 시간까지 제주시로 돌아오기 싶지 않을 듯했다. 게다가 버스와 배편을 기다리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아침 일찍 출발했어야 했다. 이에 출발지가 제주시와 가까운 18코스로 오늘 여행 코스를 변경했다.
18코스는 제주원도심 내 동문시장에서 출발해 조천만세동산까지 19.8km에 이르는 코스다. 중간에 김만덕 객주터를 지나 사라봉에 올라 제주항을 내려다보고 삼양해수욕장을 거쳐 세비코지, 닭모루, 연복정을 지난다. 다소 단조롭지만 해안가에 연한 제주 특유의 주거문화, 용천수 목욕탕, 돌과 억새로 덮인 해안선을 볼 수 있다. 사라봉을 지나면 평지이므로 20km에 가까운 거리를 다른 코스보다 상대적으로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제주올레사이트(jejuolle.org)에서는 17번 코스가 끝나는 간세라운지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나와있으나 웬만하면 카카오맵으로 김만덕객주터를 찾아 그곳을 출발지로 삼기를 권한다. 간세라운지를 출발지로 삼으면 동문시장부터 오현단까지 도심 곳곳을 뺑뺑이 돈 다음에 김만덕객주터에 이른다. 시장이라고 해야 오메기떡 말고는 볼 것도 없다. 오현단은 제주에 유배됐거나 방어사로 부임했던 옛 성현 5인을 모시는 사당이라는데 우리 땅 곳곳에 세워진 사당과 차이가 없다.
김만덕객주터는 기생 출신으로 부를 일으켜 흉년에 제주도민을 먹여 살렸다는 거상 김만덕의 헤드쿼터였다. 조선 시대에 여성으로서 온갖 차별을 이겨내고 기생 출신 여성이 제주도 최대 거상으로 성장해 굶은 이를 구원해 임금으로부터 포상까지 받았다니 거의 조선판 캡틴마블을 연상시킨다. 옛 제주 객주를 고스란히 보존해 조선시대 주거문화를 엿볼 수 있다. 그곳에서 흑돼지가 듬뿍 담긴 김치찌개를 먹고 나와 사라봉으로 향했다. 제법 가파른 길을 타고 오르니 사라봉 정상에 오르니 밑으로 제주항이 한눈에 들어왔다. 제법 많은 여객선과 화물선이 정박되어 있었다.
사라봉에서 내려오다 리본 모양의 안내 표지를 따라 내려가다가 이상해서 카카오맵을 열었다. 역시 길을 잘못 들었다. 올레길 표시는 파랑과 주황이 섞인 띠지만 이는 제주 불교종파가 달아놓은 ‘절로 가는 길' 표시였다. 주황과 짙은 고동색이 섞인 띠로 올레길 안내 표지와 비슷하다. 혹시나 사라봉에서 내려오는 길을 찾으려면 아무 생각없이 띠를 보고 내려가지 말고 배드민턴장 옆으로 난 후미진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길치에 걸맞게 엉뚱한 표시를 따라 산을 내려오다가 무거운 다리를 끌고 정상으로 되돌아갔다. 그 반대쪽으로 연결된 길을 따라 삼양해수욕장으로 내려갔다.
능선을 따라 만들어진 산길 산책로를 걷다보니 바다에 연한 길이 나왔다. 그 다음부터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해안가 도로를 따라 줄창 걸었다. 옛날 신촌에 있는 잔치집에서 음식을 먹고자 마을 사람들이 걸었다는 신촌가는 길을 따라 밭 사이를 걸었다. 바다가 왼쪽으로 흐르는 것 말고는 단조로운 풍경이 이어졌다.
삼양해수욕장은 검은 모레로 가득하다. 현무암이 바닷물로 잘게 쪼개져 만들어진 모레라 검다. 반바지 차림의 청년이 제법 덩치 큰 개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청년은 공을 바다로 집어 던지면 개는 공을 따라 주저 없이 바다로 뛰어들어 공을 물고 주인에게 돌아왔다. 청년은 반복적으로 공을 집어 던졌고 개는 바다에 뛰어들었다. 세네번 왔다갔다 하다보니 개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신기했지만 유쾌한 장면은 아니었다.
삼양해수욕장을 지나 세비코지 쯤 이르자 길을 바닷가 해안으로 바로 접해 이어졌다. 바다에 연한 길을 구비구비 걷다보면 뜬금없이 나타나는 억새밭 돌담 사이에 살짝 얼굴을 내빈 용암해변이 단조로움을 깼다. 검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해안에서 바다 낚시에 열중하는 이들이 보였다. 자갈과 흙, 그리고 풀로 이어진 길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길을 걷다보니 닭이 흙을 걷어내고 들어앉은 모양처럼 생겼다는 닭모루에 도착했다. 닭모루는 닭머리라는 뜻이란다. 이곳이 18번 코스의 하이라이트인 듯하다.
닭모로에는 정자가 제법 높이 세워져 있어 인근 바닷가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어서인지 주말을 맞아 그곳을 찾은 관광객이 많았다. 단조로운 해안에서 그나마 바다 쪽으로 돌출된 곳이라 촬영하기 괜찮았다. 사진 찍기에 몰두한 여성 2인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어줄 것을 부탁했다. 여행을 다니며 사진 촬영을 자주 부탁한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사진은 여성에게 부탁하는게 훨씬 좋다. 젊은 여성들이 사진을 잘 찍는다. 앵글도 잘 잡고 다리가 길게 나오게 찍는 방법을 안다. 여성의 감각이 남성보다 나은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여성은 남성보다 셀카 찍기를 즐겨하므로 아무래도 사진 찍는게 낫지 않을까 싶다.
그 다음부터는 키를 넘는 높이의 돌담 안에 자리한 목욕탕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라산부터 흘러내린 물이 지하수로 스며들었다가 해안가에서 솟아 나온다. 이른바 용천수다. 그러다보니 제주도 해안마을에는 용천수로 만들어진 목욕탕과 빨래터가 만들어졌다. 현무암 돌로 쌓은 담 아래 남자와 여자 목욕탕이 바닷가 옆에 지어져 있다. 지금이야 사용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솟아나는 용천수로 탕마다 물이 한가득이다. 여름에는 시원해 쓸만하지만 겨울에는 추워 이곳에서 씻는게 곤욕이었을 듯싶다.
화산 폭발로 용암이 흐르다 바닷가에 다달아 풀어지면서 넓게 퍼져 생긴 화산암 해안이 특이한 대섬에 도착하니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목적지까지 5.6km 남았다. 서둘러 걷지 않으면 목적지에 닿기 전에 사위가 어두워져 고생할 듯 싶어 발길을 재촉했다. 중간에 연북정에서 5분 쉬는 것 말고는 쉬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목적지 조천만세운동 기념관에 도착하니 오후 6시를 넘었다. 6시15분 숙소로 직행하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이제 제주 시내버스 앱을 제법 활용할 수 있어 제주도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오후 7시30분 숙소 앞 주차장에서 원석을 만났다. 숙소 근처 양고기집에서 폭탄주와 함께 지금까지 맛본 양고기 중 가장 맛있는 양고기를 먹었다. 원석이와 2004년 대학원에서 처음 만났으니 이제 16년이나 됐다. 늘 한결 같은 친구다. 부인과 자녀를 사랑하는 책임감 있는 가장이기도 하다.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에서 일탈하지 않고 그 한계 속에서 소박한 행복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살아온 날을 회상하다보니 금새 3시간 가까이 지났다. 내일 다시 떠나야 하니 술 자리를 1차에서 접고 숙소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