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0일(금) 7코스 제주올레 여행자센터 - 월평 아왜낭목 쉼터
이틀간 하루 3만보 이상을 걷다보니 지난 밤만 해도 다리가 천근만근이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자 다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걸을만했다. 지천명을 넘어선 내 몸의 회복력이란. 크으~ 숙소 앞 파리바게트에서 아침으로 닭가슴 샐러드를 먹었다. 이것으로 과연 될까 싶었으나 뭐 배고프면 언제든지 다른 거 먹으면 되지. 나는 술만 줄이면 참 몸에 해로운 건 하나도 하지 않을텐데. 매일 2시간가량 피트니스클럽에서 수영과 웨이트 트레이닝하고 샐러드와 과일, 현미 등 몸에 좋은 음식을 챙겨먹는다. 아침에 빈 속에 녹차를 우려내 마신다.
문제는 술. 지난달부터 날마다 카프리 맥주 2~3병을 마신다. 아니면 소주 한병. 술을 줄여야 한다. 같은 피트니스클럽을 다니는 지방대 총장 사모님은 "술을 자주 마신다는 건 철현씨가 외롭다는 증거야"라며 주변의 여자 후배들을 소개해주고 싶어 안달이다. 벌써 훌륭한 분 2명을 소개했다. 한분은 독일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뒤 제법 큰 건축사무소에서 기획실장을 하신다. 또 다른 분은 한일통시통역사다. 내게는 과분한 분들이다. 그런데 이상스럽게 이성에게 느껴야할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나이 먹은 탓인가, 아니면 내 인연이 아닌가. 두세차례 만났지만 아무 감정이 생기지 않아 연락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세번째 여인을 소개한다고 하시니. 이거야 원.
오늘은 제주 올레길 코스 중 가장 아름답다는 7 코스를 걷기로 했다. 숙소 근처 정류장에서 181번 급행버스를 타고 1시간가량 달려 서귀포환승 정류장에서 내렸다. 이곳에서 카카오맵에 의지해 출발지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 도착했다. 여행자센터에는 여행객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오늘 걷기에 대해 논의하는 듯한 커플도 있었다. 할아버지 한분은 동료들과 떨어져 커피 한잔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하루 2만원가량 내면 하루 묵을 수 있는 방이 있었다. 1인1실, 2인1실, 도미터리룸까지 갖추고 있다. 대충 둘러보다 칠십리 시공원을 향해 길을 잡았다.
도심을 돌다 길을 잘못 들어 7 코스가 아니라 7-1 코스로 가고 있었다. 동양 최대 마르형 분화구라고 하는 하논분화구까지 와서 길을 잘못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오던 길을 한참 되돌아가 코스 7과 겹치는 칠십리 시공원에 닿았다. 천지연폭포 근처까지 걷다가 간신히 길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코스 7 화살표와 7-1 화살표가 섞여 있다보니 엉뚱한 길로 들어서는 여행객이 많다고 한다. 혹시나 코스 7을 걷고자 하는 이는 주의하기 바란다. 워낙 길치다보니 난 어김없이 길을 잘못 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길을 바로 잡은 뒤 칠십리 시공원에 들어서니 어르신들이 여럿 모여 게이트볼에 열중하고 있었다. 잔디밭에서 둥근 공을 ‘딱’ 소리를 내며 치고 걸어가는 어르신들 뒷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꼬불꼬불 안내를 따라 가다 보니 왼쪽에 숲의 울창함이 다하고 느닷없이 두줄기 폭포가 나타났다. 천지연폭포가 두줄기 물줄기를 내리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멀리 한라산이 거대하게 턱 버티고 있었다. 앞쪽으로 숲 속 깊이 움푹 패인 곳에 자리한 천지연폭포가 자리하고 그 뒷쪽으로 펼쳐진 한라산의 위용을 한눈에 들어와 사진 촬영하기 좋았다.
시공원을 벗어나자 도로가 이어지다 텅 빈 게스트하우스들을 지나 삼매봉에 오르는 길로 접어 들었다. 삼매봉에서는 꿩 암컷인 까투리가 불쑥 튀어 나왔다. 아항~ 오늘은 너로구나. 뱀, 나비에 이어 오늘은 까투리가 벗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까투리를 도망가지 않고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잡았다. 삼매봉에서 단숨에 올라 내려오자 길은 제주 남해안에 인접한 외돌개로 이어졌다.
외돌개는 높이 20미터 바위섬이다. 비석이나 먹처럼 가로 세로에 비해 높이가 긴 돌이 삼매봉 남쪽 기슭에 바다에 솟아 있었다. 150만년 전 화산 폭발에 생겼다고 한다. 그 정상에는 소나무를 비롯해 식물군이 서식하고 있었다. 그 좁고 해풍이 끊이지 않은 곳에 뿌리를 내린 생명력이 놀라웠다. 외돌개 오른쪽으로 범섬이 자리했다. 돔배낭길이라는 해안가 산책로를 따라 걷는 내내 범섬이 따라왔다.
범섬이 바라 보이는 곳에 할머니 한분이 회와 컵라면을 팔고 있었다. 이곳에서 컵라면에 막걸리 한병 시켜 범섬을 바라보고 마셨다. 막걸리가 속을 찌르고 들어갔고 라면은 더부룩하게 빈 속을 채웠다. 밤섬 앞에서 바다 바람을 안고 막걸리를 마신다니 신선놀음이 아닐 수 없었다. 여사친 성희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디냐?”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범섬 보고 막걸리 마신다"라고 답했더니 “신선놀음하고 있다"는 부러움 섞인 답변이 돌아왔다.
오늘 쪽으로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왼쪽으로 바다에 접한 돔배낭길을 따라 걸었다. 물이 깊이 흐른다는 속골을 지나 이내 수봉로로 접어들었다. 수봉로는 애초에 사람이 다니지 못하는 길이었다고 한다. 염소나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길이 정돈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을 김수봉이라는 사람이 삽과 곡괭이로 길을 냈다고 한다. 그래서 길 이름이 수봉로. 얕은 숲으로 이어지다 바다로 나왔다가 다시 숲으로 꼬불꼬불 길이 나있었다. 이 길을 혼자서 냈다니 감탄했다. 길은 숲과 바다가 접하면서 이어지다가 일강정 바당올레에 닿았다. 걷는 내내 왼쪽으로 범섬이 조금씩 다가왔다. 사다리꼴 모양이었다가 서쪽으로 갈수록 사다리꼴 뒷면에 숨어있던 범 머리에 해당하는, 본섬에서 떨어진 작은 섬이 나타났다. 범섬이 크고 작은 2개 섬으로 나누어지고 눈으로 섬 절벽 모양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경치가 아름답다보니 크고 작은 호화스러운 집과 펜션, 커피숍이 나타났다. 동백꽃잎이 떨어져 바닥을 빨갛게 물들이고 물은 솟아난 현무암에 부딪혀 하얀 포말을 내며 소란스럽게 바다로 흘렀고 돌은 담부터 해안까지 지천으로 깔려 제주를 꾸몄다. 돔배낭길에서 제주는 꽃의 빨강, 물의 투명한 하양, 현무암의 짙은 검정, 그리고 외돌개의 연회색까지 짙은 색조화장으로 정성껏 자신을 꾸민다.
두머니물에서 썩은도까지 길은 검은 용암석 자갈이 깔려 끝도 없이 이어졌다. 바로 옆에 바다가 잔잔하게 출렁이는 돌길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니 손 앞에 잡힐 듯 썩은도가 나타났다. 썩은도는 섬 토질이 죽은 흙이라고 해 ‘썩은 섬’이라고 한다. 하루 두번 썰물일 때마다 뭍에서 섬까지 이어지는 길이 나타난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썩은도 앞에 왔을 때는 밀물이라 가는 길이 징검다리처럼 이어질 뿐 걸어서 갈 수 없었다.
썩은도를 지나면서 다시 어두워졌다. 시침은 이미 5시를 지난지 오래다. 가까스로 찾은 길을 따라 앞만 보고 걸었다. 월령포구를 지나 월평야외낭목 쉼터까지 걸어가는 길은 겁났다. 생전 처음 오는 길을 어둠이 숨기고 있었고 개들이 집 근처를 지나는 낯선 이를 향해 미친듯이 짖어댔다. 다음에는 랜턴을 가져와야 겠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지에 도착해 스탬프를 찍었다. 그런데 시골 깊숙이 들어온 탓인지 제주시로 돌아가는 버스정류장을 찾기 힘들었다. 도착지 옆에 버스정류장은 있었는데 이곳은 제주시와 반대방향이라 길 건너에 있는 정류장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정류장이 없었다. 주위는 어둡고 개는 짖고 오가는 사람은 없으니 난처했다.
제조올레 콜센터에 연락해 제주시로 돌아갈 방법을 물었다. 안내원이 전화 받자마자 “어두운데 지금까지 어디서 뭐해요?”라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친절한 안내 끝에 길 건너 집 담 밑에 숨어있는 작은 정류장을 발견했다. 밤이 되자 기온이 떨어진 탓에 추위가 엄습했다. 시골 동네 작은 정류장에서 혼자서 추위에 견디면서 40분가량 기다리자 어둠 속에서 은하철도999처럼 시내버스가 다가왔다. “휴! 살았다.” 낯선 행성에서 지구행 우주 기차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얼른 올라 타 중문고등학교 정류장까지 가서 181번 급행버스를 탈 수 있었다. 그 다음부터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곯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