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도보여행 둘째 날. 올레길 1코스를 걷기로 했다. 올레길 코스 중에 가장 먼저 생겼다고 한다. 올레길 조성 초기 심사숙고한 끝에 출발지로 택한 곳이 시흥리라고 한다. 시흥리는 ‘시작하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제주 부사가 임관하면 이곳을 출발해 제주 일대를 살펴본다고 하니 올레길 출발지로서는 안성맞춤인 듯하다. 오름 두 곳을 오르다 종달리 옛 소금밭을 지나 바다로 이어진 길로 나오면 성산일출봉을 지나 광치기 해변까지 해안을 따라 15.1km를 걷는 코스다. 안내서에서는 4~5시간이면 종주할 수 있다고 적혀 있으나 걷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빠져 넋 놓다 보면 예정보다 2~3시간은 지체되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도착지에 닿으면 사위가 어두워 오후 6시만 돼도 코스를 찾기 어려웠다. 제주에서도 겨울 해는 짧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해 우비와 우산까지 챙겨 숙소를 나왔다. 제주 롯데시티 호텔 옆에 위치한 숙소 현대오피스텔에서 도보로 5분 한라병원 앞 버스정류장에 와서 시외버스터널 가는 버스에 올랐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11번 급행버스를 타고 고성리회전로터리에서 내려 201번을 갈아타고 10분가량 가니 시흥리에 도착했다. 비가 흩날리고 바람까지 불어 을씨년했다. 제주는 섬 한가운데 자리한 한라산으로 인해 같은 날이라도 동서남북 날씨가 다르다고 한다. 또 시시각각 바뀌었다. 햇빛이 비추다 느닷없이 구름이 끼더니 바람과 함께 비가 흩날렸다. 그러다 해가 갑자기 쨍하고 나왔다.
1번 코스 출발지 시흥리에서 말뫼오름까지 이어지는 길은 사람 한명 마주치지 않을 정도로 한적했다.
정류장에서 걸어 시흥리 입구에 도착했다. 시흥리 초입에서 말뫼오름까지 사람을 마주치지 않았다. 바람에 섞인 새소리만 들렸다. 현무암으로 쌓아 올린 돌담으로 구분된 밭에 핀 경작물들이 싱그러웠다. 비가 흩날리면서 바람이 불었지만 그리 어둡지 않아 밭에서 자라는 당근을 비롯한 녹황색 채소들이 싯푸르게 푸르렀다. 푸른색 융단을 검은 돌담을 경계로 이음한 조각 이불이 말뫼오름까지 뻗었다. 이 넓은 공간에 오로지 나 홀로라는 걸 깨닫자 고즈넉함과 함께 느슨하게 풀어진 해방감이 목까지 차올랐다. 과하지 않은 행복감이 스멀스멀 올라와 코 끝에서 숨으로 흘러나왔다.
말뫼오름 초입에 위치한 올레길 여행자센터에 들렀으나 기념품을 눈팅만 하다 바로 나왔다. 요즘 주식시장이 좋다 보니 주식 평가이익이 상당했다. 그래서 지를까 했는데 살게 없었다. 오름에 들어서자 비가 그쳤다. 햇볕까지 비추니 덧옷을 벗어야 할 정도로 기온도 올랐다. 자전거 출입을 막는 장애물을 지나 침엽수와 낙엽송이 섞여 핀 숲 사이에 난 등산로를 따라 걸었다. 10분가량 걸었나 갑자기 제주 동쪽 바다가 눈 앞에 펼쳐졌다. 왼쪽에는 우도가, 오른쪽에서 성산일출봉이 맞절하듯이 나란히 바다에 떠 있었다. 우도는 소 머리 모양의 봉을 성산일출봉 쪽으로 뻗었고 성산일출봉은 새침하게 볼록 솟았다. 그 앞 육지에는 검은 돌담을 경계로 나누어진 조각 밭들이 푸른색으로 해안까지 뻗었다.
말뫼오름에서는 멀리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뭍에는 푸른 밭들이 조각보처럼 펼쳐졌다.
바다의 옅은 파랑과 밭의 짙은 초록에 정신이 팔려 오름 정상에 오르자 할아버지 한분이 맞이했다. 할아버지는 우도부터 성산일출봉 넘어 멀리 장막처럼 펼쳐진 검은 구름 떼를 가리켰다. “바람이 비구름을 몰고 오고 있네. 곧 비가 쏟아질 거야.” 낯선 오름에서 큰 비를 맞으면 내려가는 길이 미끄러워질 수 있어 하산을 서둘렀다. 가는 길에 호랑나비가 주위를 맴돌았다. 어제는 뱀을 만났는데 오늘은 나비가 맞이하는 건가. 여행 내내 징크스가 되길 바랐다. 내일에는 또 다른 동물이 나타날 것이는 예감이 들었다. 호랑나비를 따라, 아니 나비가 나를 따라 함께 걸었다. 햇빛이 다한 그늘진 길로 들어서니 나비는 이별을 고하고 날아갔다.
잠깐 제주 올레길을 함께 한 호랑나비, 첫째날 뱀 출현에 이은 둘째날 징크스.
말뫼오름에 벗어나자 바로 잇닿은 알오름에 오르는 길이 나타났다. 말뫼오름과 알오름 경계는 억새 밭이다. 억새들이 바람에 맞춰 “쏴~” 소리를 내려 바람이 오는 반대 방향으로 쓰러졌다 일어나며 춤을 추었다. 장관이었다. 하늘에서는 아직 햇볕이 강하게 쏟아졌고 바람은 힘차게 불면서 억새들이 뮤지컬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출연자 전원이 나와 펼치는 칼군무를 연출했다. 억새밭 사이로 난 산책로를 따라 알오름에 오르니 제주 동해가 하얀 구름을 덧댄 하늘의 파랑과 함께 “훅"하고 다가왔다. 내려가지 못하고 정상에서 한참 머물렀다.
말뫼오름에서 알오름으로 넘어가는 곳에는 억새밭이 바람에 맞춰 칼군무를 펼친다.
알오름에서 내려오자 종달리 소금밭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가다 배 고파 눈에 띄는 동네 식당에 들어갔다. 하얀색 외관에 작은 식당으로 참 이뻤다. 이곳에서 단돈 8000원에 제주도 흑돼지 볶음, 조개 양념무침, 상추쌈, 간장게장, 자반무침까지 배 터지게 먹을 수 있었다. 취향저격에 가까운 음식들을 가장 푸짐하게 그리고 가장 싸게 먹었다. 친절하기 그지없는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 덕분에 제주에서 와서 가장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에너지를 보충한 뒤 다시 걸었다. 심심하기 그지없는 종달리 옛 소금밭을 지나 바다에 이르니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고 비도 흩날렸다.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코스를 따라 걸으면서 줄지어 매달린 한치들의 사열도 받고 옹기종기 해안가 돌무더기 위에서 군집한 수백 마리의 갈매기 떼도 만났다. 바다는 먹구름 탓에 어두웠지만 바닷가에 들어선 고급스러운 호텔이나 펜션을 구경했다. 날이 밝으면 아름다운 해안일 듯하다. 그래서 이리 많은 고급스러운 호텔과 펜션이 줄지어 들어섰겠지.
종달리 작은 식당에서 배터지게 먹었다. 위 메뉴 값은 고작 8000원. 그리고 무제한 리필이 가능하다.
해안은 성산항까지 이어졌다. 성산항 근처에서 길을 잃었다. 나처럼 길을 잃고 돌아오고 있는 여행객 2명을 만났다. 카카오맵까지 꺼내 간신히 코스길을 찾아가다 보니 성산일출봉까지 왔다. 성산일출봉이야 여러 차례 왔던 곳이라 새롭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바로 수마포 해안으로 넘어가려 했다. 그러다 성산일출봉 서쪽 절벽면을 보고 그 밑 해변으로 내려갔다. 성산일출봉 한쪽을 깎아 내듯이 가파른 곳 밑에 검은 현무암 덩어리들이 해안을 따라 튀어나온 소박한 해안이 숨어있었다. 회 파는 식당이 자리 잡고 있어 풍치를 버렸지만 작은 해안과 그 위에 솟은 절벽 단면은 아늑했다. 성산일출봉을 여러 차례 왔지만 이 해안은 처음이었다. 늘 정상만 바라고 올라와 정상 분지만 보고 내려왔으니 구석에 자리한 멋진 곳을 보지 못한 것이다.
종달리에서 성산항까지 이어진 해안을 걷다도면 갈메기떼와 한치의 사열을 받을 수 있다.
사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해 서둘러 해안길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조선시대 육지로 보낼 말을 모아 배에 실었다는 수마포 해안을 지나자 4.3 학살현장이 나왔다. 성산일출봉이 병풍처럼 펼쳐진 보이는 해변 모래사장에서 육지에서 온 보안군이 1949년 젖먹이부터 80대 노인까지 대량 살육을 저질렀다. 학살 현장을 볼 때마다 인간은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굳힌다. 나는 인본주의자가 아니다. 내게는 오름 길가에 조용히 서 있는 나무나 지나는 발길 위에 노니는 나비가 인간보다 소중하다. 호머 사피엔스들이 언젠가 반드시 죗값을 치르기 바란다.
성산일출봉 서쪽 절벽 아래 자리한 작은 해변
정신없이 해변을 걷다 보니 도착지 광치기 해안에 도착했다. 젊은 연인들이 찾아와 사진 찍기 정신없었다. 해안으로 길게 늘어선 평평하고 넓은 바위 위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고 포즈를 취했다. 성산일출봉이 배경을 자처했다. 긴 머리 흩날리는 청년에게 다가가 사진 촬영을 쑥스럽게 부탁했다. 흔쾌히 승낙하며 정성껏 찍는 친구의 친절함에 감사했다. 밝은 청년이었다.
목적지 광치기 해변에서 도착하니 사위가 어두워졌다. 제주에서도 겨울 해는 짧다.
사진까지 찍고 나니 아주 빠르게 어두워졌다. 벌써 오후 6시에 가까워졌다. 버스 시간 기다리며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잔했다. 제주는 서울과 달리 버스 배차 간격이 제법 있다. 미리 시간 맞춰서 움직이지 않으면 30~40분 기다리기 일쑤다. 제주가 시골이라고 느끼는 유일한 때다. 물가는 서울과 비슷하다. 음식 값이나 대중교통 이용료를 서울과 별 차이 없다. 고성인회전교차로까지 와서 급행버스를 타고 1시간가량 숙소로 돌아왔다. 하루 3만 보 넘게 걷다 보니 발바닥과 허벅지가 비명을 지르고 있다.
카프리 3병 사들고 숙소로 들어가 씻고 한잔하고 있으니 옆 방에서 아주 큰 소리가 났다. 텔레비전 볼륨을 지나치게 크게 틀어놓은 것이다. 새벽 1시가 지나도 볼륨은 줄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옆집 초인종을 누르고 방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이 없었다. 오로지 텔레비전 소리가 크게 날 뿐이었다. 누가 텔레비전을 켜놓고 방을 나가거나 아니면 방 주인이 심장 마비에 걸린 게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새벽 2시 넘어 관리사무소에 내려갔으나 아무도 없었다. 결국 방에 올라가 옆방에 잇닿은 벽에서 최대한 멀리 침대를 옮겨 잠을 청했다. 아침까지 텔레비전 소리는 여전히 크게 울렸다.
일어나마자 관리사무소에 이 사실을 알렸다. 옆 방에서 무슨 일 난 거 같다고. 나는 제주 올레길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7번 코스를 걷기 위해 출발지 서귀포시 제주올레 여행자센터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밤늦게 돌아와 보니 옆집 주인이 부부싸움 끝에 만취한 상태에서 텔레비전을 켜놓고 잠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작가를 자처했다고 한다. 누가 물어봤대. 별 거짓 같은 인간이 세상에는 많다. 뭘 쓰기 전에 제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인간 먼저 됐으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