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끝나면 독일에 오세요, 하이델베르크를 잊지 마세요.
저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는데도 한국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음식과 술이 맛있는지, 어디가 여행지로 완벽한지, 무엇을 사야하는지. 저는 음식과 술은 집에서 편안히 먹고 마실 수만 있다면 다 맛있습니다. 전 가리는 재료가 많아서 그렇지, 입맛이 까탈스럽진 않거든요. 여행지는 사람 적은 곳이라면 다 좋습니다. 그래서 호캉스가 제일 좋습니다. 가서 하는 일이라곤 작은 호텔방에 틀어박혀 술 마시고 마카롱 먹고 책 읽는 것밖에 없지만요. 그리고 다른 거 백 가지 사느니 사고 싶었던 책 열 권 사는 게 더 행복하니까요.
하지만 독일이라면 좀 다릅니다. 묻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소개해주고 싶은 도시가 다 다르거든요. 서울을 좋아하시나요? 베를린에 가세요. 호화로운 여행을 해보고 싶은가요? 뮌헨에 가세요. 자연을 좋아하시나요? 프라이부르크에 가서 슈바르츠발트와 티티제에 가세요. 와인을 좋아하시나요? 라인가우 지역의 아무 도시에나 가보세요. 그 중 뤼데스하임은 여름엔 푸른 와이너리의 풍경이, 겨울엔 독일에서도 아름답기로는 손 꼽히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기다린답니다. 그림 형제의 동화를 좋아하시나요? 마부르크에 가보세요. 한국엔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예술가의 흔적을 찾고 싶으신가요? 도시락을 챙겨서 브레멘 근처의 보릅스베데에 위치한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집에 가보세요. 저를 만나고 싶으신가요? 마인츠로 오세요.
어디를 가보셨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하이델베르크를 잊지 마세요.
제가 하이델베르크에 처음 가본 건 2017년 8월, 첫 유럽 여행을 하던 때였습니다. 도착한 날의 감상을 ‘하이델베르크는 비가 왔다. 비에 젖은 모습이 어울리는 동네. 이곳을 좋아할만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여행하면서 누군가와 함께 오면 좋겠다고 생각한 곳이 몇 군데 있는데 이곳은 정말 그 사람들과 꼭 다시 오고 싶다.’라고 적어두었네요.
하이델베르크는 생각해보면 특별할 게 없는 도시 같기도 합니다. 관광지로 유명한 도시 치고는 너무 허술한 중앙역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여기저기 무너져내린 성이 있는 시내로 가면 사람이 바글거리고, 대학 도시답게 한국인 유학생이 많아서인지 곳곳에서 한국어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죠. 뭐, 성에서 바라보는 붉은 지붕으로 뒤덮인 시내의 풍경은 참 예쁘고, 강 건너 철학자의 길에서 보는 야경도 참 아름답긴 합니다. 하지만 독일 어디를 가나 구도심의 풍경은 대체로 비슷한 느낌으로 아름다운데, 왜 유독 하이델베르크의 풍경만 애틋한 기억으로 남을까요. 매번 똑같은 곳을 구경하고, 똑같은 상점에 가는데도 그곳엔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듯 합니다.
이번 여행에서 깨달았습니다. 저는 하이델베르크를 혼자 돌아다녀본 적이 없고, 그 점이 하이델베르크를 특별한 도시로 만들어주었다는 걸요. 처음 도착했을 땐 호스텔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일행이 되었고, 두 번째 여행은 엄마와 함께였고, 세 번째 여행은 동생과 함께였습니다. 이번엔 애인과 함께였습니다.
저는 원래 혼자 여행하는 걸 좋아합니다. 맛집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성격이라 여행 중엔 끼니를 거를 때가 많고, 샤워가 가능하고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만 있다면 숙소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딜 가든 서점에 들어가는 걸 좋아하고, 거기서 시간 낭비하는 일도 많습니다. 사진도 찍으면 찍는 거고 말면 마는 거라, 제 사진을 남기는데는 큰 욕심이 없습니다. 어느 도시에 도착해서 여길 가겠다는 목표만 있으면 다른 건 알아보지도 않고 시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보낼지도 계획하지 않습니다. 걷는 걸 좋아해서 가능하다면 조금 헤매는 한이 있어도 여행지에서 택시는 타지 않습니다. 대신 하루의 마무리로 술이 아주 중요한 여행자입니다. 동행이 생기면 이런 취향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여행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물론 동행이 없는 여행을 선호한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죠. 혼자 정처없이 걷다보면 강가에 앉아 친구와 맥주 한 잔 하고 싶은 날도 있고, 예쁜 서점을 발견하면 독서 모임 친구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종일 굶다 저녁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남이 해주면 밥이랑 김치만 있어도 맛있다는 엄마 생각이 나고, 자전거 타기 좋은 길이나 풍경이 예쁜 곳에선 아빠 생각이 나고, 인생샷 찍기 딱 좋은 곳에선 동생들 생각이 나고……. 다 그런 거죠.
마음 편히, 멋대로 돌아다니다 조금 외로운 기분을 안고 집에 돌아와 여행지를 떠올려보면 배경만 둥둥 떠오릅니다. 결국 오래 기억에 남는 건 사진으로 찍어놓은 풍경이 아닙니다. 호스텔에서 만난 다른 여행객들과 대화를 나눴던 순간, 식당이나 카페에서 본 개와 주인들이 건넨 호의, 우연히 동행이 된 이들과 여행 후 함께 술을 마시며 먹었던 음식, 마음에 쏙 드는 책이나 엽서를 발견하고 기뻐하던 친구들의 얼굴입니다. 하이델베르크는 곳곳에 얼굴과 표정이 남아 있어서 저에게 특별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돌아간 하이델베르크에서 저는 그 흔적을 찾아다녔습니다. 늘 가는 리큐어샵에선 호스텔에서 만났던 동행들의 명랑한 표정을 발견했습니다. 알테 브뤼케Alte Brüke 근처에선 오래 된 건물을 리모델링한 호텔에 만족한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바의 테라스에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행복해진 동생이 앉아있었습니다. 겹겹이 쌓여있는 얼굴과 대화와 사건을 발견하다보니 그 순간들이 그리워졌습니다. 코로나가 없던 시절, 마스크 없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기에 기억할 수 있는 얼굴이 있다는 게 감사했습니다.
하이델베르크는 독일 내에서도 확진 케이스가 적은 편에 속하는 곳이어서 마침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취식이 가능해졌던 터라 사람으로 가득했습니다. 독일에 도착하고 처음으로 그런 인파를 본 거라 저도 애인도 당황했습니다. 규제가 완화되는 도시이니 사람이 많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으니까요. 근처에서 유학 중인 후배와 후배의 남자친구도 불러냈는데, 막상 만나고 나니 사람이 너무 많아 이도저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커피 한 잔 마시려고 넷이서 하염없이 걷고 걷는 동안 인파에 치여 제대로 대화도 나누지 못했습니다. 물론 커피를 마실 때를 제외하곤 마스크도 벗지 못했고요. 그러니 이번 여행을 추억하면 마스크에 반 이상 가려진 얼굴들만 떠오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속상하기도 합니다. 어서 우리에게 여행의 자유가 돌아와서, 다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온전한 표정을 기억에 남길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이렇게 쓰고 나니 하이델베르크를 제 사적인 추억 때문에 추천하는 게 되어버렸네요. 변명해보자면, 하이델베르크는 굳이 제 추억이 아니어도 무난히 추천할 만한 도시입니다. 풍경도 있고, 관광할 만한 장소들도 있고, 맛집도 있고, 사진 찍을 곳도 많으니까요.
이건 막연하게 하이델베르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다 이번에 알게 된 건데, 하이델베르크에선 마크트플라츠Marktplatz를 중심으로 큰 길을 따라 걸으며 옆으로 난 좁을 골목으로 보이는 풍경을 놓치지 마세요. 작고 귀여운 간판들, 우연히 보게되는 나무, 슬쩍 보이는 지붕들이 성에서 내려다보는 풍경과는 또 다르게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럽더라고요. 하나하나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건 풀꽃만이 아니라, ‘너’만이 아니라 하이델베르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기왕이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가보세요. 자세히, 오래 볼 수록 아름다운 사람과 하이델베르크에서 오래 걷고 오래 대화를 나눠보세요. 하이델베르크의 풍경에 그 사람의 웃는 얼굴을 남겨두세요. 애틋한 마음을 조금 남겨두고 돌아오는 여행지가 될 수 있도록. 언제든 그곳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도록.
이 글은 저와 하이델베르크를 함께 걸었던 모든 이들에게 바칩니다.
그리고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느라 하이델베르크에서는 함께 하지 않았지만,
제 첫 유럽 여행 메이트이자 최고의 여행 메이트였던 유진 님과 교린 님에게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