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이 왜 한국 성을 갖기로 했냐면
독일 호적사무소Standesamt에서 혼인 신고와 결혼식을 하려면 필수인 공무원과의 상담을 하러 갔을 때였다. 담당 공무원이 나에게 성을 바꿀 생각이 없는 게 맞는지 물었다. 나는 바꾸지 않겠다고 말했고 M은 바꾸겠다고 말했다.
성姓은 독일어로 Familienname다. 가족의 이름. 이곳에는 결혼 후 성과 관련해 몇 가지 옵션이 존재한다. 첫번째, 양 측 모두 각자의 성을 가지고 간다. 두 번째, 한 명이 배우자의 성으로 바꾼다. 세 번째, 한 명이 자신의 성과 배우자의 성을 모두 가진다(배우자의 성이 김이고 내 성이 박이라면 김박이 되는 식). 한국에는 없는 문화이기 때문에 결혼 후 배우자의 성으로 바꾸는 일이 흔한 나라의 파트너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한 번쯤은 이 문제에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결혼 준비 과정에 있어서 이 부분이 큰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애초에 성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지금은 전혀 생각이 없지만) 언젠가 우리가 아이를 갖게 된다면 무조건 내 성을 줄 거라고도 했었다. 독일에서 독일인으로 자랄 아이에게, 확실한 한국의 일부를 주고 싶으니까. 그러니 결혼 후 우리 둘 중 한 명이 성을 바꾼다면 그건 M이어야 한다고, 나도 M도 생각했다.
그동안 '박'이라는 내 성씨에 강한 애착이 있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워낙에 흔한 성이기도 하고, 나는 아빠 쪽 가족들과 가깝지도 않으니까. 유명했던 남자 축구 선수와 같은 이름이라, 하필이면 이 성에 이 이름이어서 놀림당했던 날들엔 내 이름을 미워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막상 M이 가족 성을 가지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당연히 내 성을 지키고 싶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결혼을 했다고 해서 법적으로 성을 바꿀 방법이 없다. 법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발급 받게 될 모든 공문서는 물론 내 주민등록증, 여권 등에 적힌 성도 바꿀 수 없다. 이곳에서 어찌저찌 배우자의 성을 갖게 된다고 해도 한국에서 내 성이 바뀐 건 아니기 때문에 한국에서 발급 받은 공문서나 신분증으로 관공서 업무 처리 시 일이 복잡해진다. 그때마다 왜 여기 적힌 성과 저기 적힌 성이 왜 다른지를 설명하고, 어떤 게 법적으로 내 성인지 따져봐야 한다. 이미 끔찍할 정도로 복잡한 관료주의의 나라에서 내가 그렇게까지 하고 싶냐고 물으면, 당연히 아니었다. 반면 M이 성을 바꾸는 건 과정 자체도, 그 이후의 일들도 훨씬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또, 한국인이라는 게 매일 자랑스럽기만 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해서 나의 뿌리가 한국에 있다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나에게 수많은 처음과 도움닫기를 선물해준 나라. 내가 매일 편하게 읽고 쓸 수 있는 언어를 선물해준 나라. 그리고 그 모든 걸 공유해온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는 나라에서 갖게 된 성을, 독일에서 살 거란 이유로 저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독일에서 살 거라면 독일인의 성을 가지는 게 더 편하지 않겠냐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름Vorname까지 바꾸지 않는 이상 별 의미가 없기도 하고, 내가 '독일인스러운' 이름, '독일인스러운' 외모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해서 나를 차별하거나 냉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 항의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 성을 바꾸는 건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고작 성 때문에 나를 차별할 사람이라면, 내가 독일인의 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차별하지 않을 사람이 아닐 테니까.
마지막으로, M의 가족과는 가까이서 시간을 보내며 우리가 가족임을 느끼고, 나의 가족과는 비록 멀리 떨어져있더라도 이름으로 친밀함을 느끼고 싶었다. 모든 것이 M에게 더 익숙한 환경, M의 뿌리에서 시작하는 가족이지만, 적어도 한 가지 쯤은 나의 뿌리에 닿아있길 바랐다. 내가 독일에 산다고 덜 한국인이 되는 게 아니듯, M이 성을 바꾼다고 덜 독일인이 되는 건 아니라고 믿는다.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 M은 독일인으로, 나는 한국인으로 살 테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가족 성 아래, 우리만의 규칙과 문화와 추억을 쌓아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잊지 않는 건 나에게도 M에게도 중요했다.
나는 이제껏 영어로 서명할 때 이름만 사용해왔는데, 결혼식 당일부터는 성도 포함하게 되었다. 나의 정체성과 의견을 존중해 흔쾌히 성을 바꾼 M을 위해서 나도 내 이름 석 자에 포함된 '박', 이 한 글자를 더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어제 M은 여권과 신분증 등을 재발급 받기 위해 관청에 다녀왔고, 오늘은 사무실 명패 이름이 뒤에 붙은 성을 Park으로 수정했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그 사진을 보니 우리가 정말 가족이 되었구나. 괜히 감동이 밀려오는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