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으로 불릴 것인가?
내가 하는 일, 내가 불릴 수 있는 나의 업이 명사화된 일로서 모두에게 잘 알려진 일일 때가 가장 쉽다. 예를 들어 전문 자격사인 경우. 변호사, 세무사, 회계사, 변리사. 혹은 직업의 경계가 매우 명확한 경우. 선생님, 교수, 업장의 사장님 등. 그런데 내가 하는 일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전문 자격사도 아니고 경계가 뚜렷한 일이 아닐 경우,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정체성 혼란은 너무나 자주, 쉬이 온다.
물론 그래서 우리 사회에 가장 회색적인 직업의 명사가 있다. 회. 사. 원.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다. 프. 리. 랜. 서. 회사를 다니지 않지만 일을 하는 사람이다. 여기서부터 한걸음 더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 회사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프리랜서로서 하는 일이 정확히 뭡니까?
자신의 쓸모를 매번 입증해야만 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업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명칭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서러운 일인지, 겪어본 사람은 너무나 잘 알게 된다. 그나마 공학 쪽이라면 전공 분야의 명확성이라도 존재한다만, 문과 쪽이었다면 이마저도 글렀다.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라는 질문 앞에서 당당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부터는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 답하기 위한 성찰. 우선, 생각난 김에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적어본다.
- 글을 잘 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유형의 글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 한글, 워드, 엑셀, PPT 등 문서작성을 위한 도구 사용에 능숙해 문서작성 능력이 높은 편입니다.
- 다양한 분야의 자료수집 및 보고서 작성 경험이 다수 있습니다.
- 공공기관 및 연구기관 재직 경험에 따른 커뮤니케이션 역량이 높은 편입니다.
- 영어는 문서를 이해하고 쓸 만큼 할 수 있습니다.
- 공학과 사회학의 경계에 있었던 터라 매우 깊은 전공분야만 아니면 대부분의 영역에 대한 이해도가 높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생각나는 것들을 정리해 본 바, 나는 그저 '회사원'이 갖추어야 할 기본 역량 정도를 갖춘 듯하다. 그렇다면 이런 역량을 가지고 '무엇을 해왔는가?' 그렇다. 기본 역량을 가진 것 까지는 그럴 수 있지만 사회 초년생이 아닌 이상 역량은 됐고, 어떤 업계에서 어떤 경험을 쌓아왔는가에 대한 경력의 일관성이 있어야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에 대한 답이 가능하다. 나는 무엇을 해왔는가?
나는 연구기관, 시 산하기관, 대학의 연구소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무엇을 했냐? 늘 과학기술 정책 관련 프로젝트를 했다. 프로젝트 안에서 나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나? 기획회의에 참여하고, 아이디어를 만들고, 자료를 찾고, 발표자료를 만들고, 연구결과에 대한 보고서를 쓰고, 보고서 에디팅도 했다. 행사를 기획하고, 위원회를 운영하며 회의를 소집하며, 각종 수반 행정업무 또한 수행했다.
정리하면, 나는 커뮤니케이션(언론)과 과학기술 혁신 정책을 전공했고 연구소와 시 산하기관, 대학 연구소에서 과학기술 분야 정책(법, 제도) 프로젝트 기획, 운영, 보고서 및 논문 작성 등의 업무 경력이 있다. 가장 최근에 한 프로젝트는 - 이러저러한 - 정책이다.
그러니까 나는 과학기술 정책 기획자이다. 그렇다. 나는 과학기술 정책, 법과 제도와 관련하여 이슈를 찾아내고 법과 제도, 정책적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사람, 기획자이다. 단 한 번도 그렇게 내뱉아보지 못했지만 정리하고 보니 내가 해왔던 일의 공통점은 과학기술 정책 기획이었다. 비록 경력이 짧아 주로 프로젝트 책임자가 아니라 구성원으로서 일한것이긴 하지만.
혹시나 다음 프로젝트가 생기게 되면 꼭 이렇게 이야기 해야겠다. "언론과 과학기술 정책 전공자로서 프로젝트 관련 정책, 법과 제도 검토와 문서 작성, 언론 대응 등을 맡아서 수행할 기획자입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