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 집 살이를 한다

by 시선siseon

주말이 다가오면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이번 주엔 '어느 집'에서 지낼 것인지를 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말부부다. 주말부부는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며 흔히 결혼한 사람들은 부러움 섞인 시선을 보내지만 그 행복은 아이가 없다는 전제 하에 가능하다. 애당초 서울에서 개인사업을 하는 신랑과 부산에서 직장을 다니던 내가 계획에 없던 아기의 존재를 처음 맞닥드린 순간, 집과 집을 전전하는 고난은 예견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아기를 낳고 육아휴직 덕에 아기와 서울에서 지내던 나는 점차 시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어떤 주위의 도움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평생 '어떤 일을 하고 살 것인지'를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왔던 내 삶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었다. 직업이 없는 삶을 산다는 것 자체를 단 한번 생각해본 적 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혈혈단신 서울에서 고시원 생활을 하며 유학을 준비하면서도 힘든 줄 몰랐고, 전공을 바꿔 학위과정을 두 번이나 거치면서도 늘 지금의 고생이 더 나은 '일'과 '일을 할 수 있는 자리'로 나를 이끌어 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애당초 주말부부도 개의치 않았다. 각자 일이 바쁜데 주말에만 만나면 되지,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니 가족계획 따위가 있을 리 없었던 우리에게 갑작스레 찾아온 아기가 처음에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아기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나는 육아휴직을 했고, 6주간 부산에 있는 친정에서 몸을 추스른 다음 간신히 눈이나 맞추는 아가를 안고 기차를 탈 수도 없어서 5시간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육아휴직이 끝나갈 쯤이 되자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복직 프로세스를 알리는 경영팀의 목소리엔 의심이 한가득이었다. "그런데.. 지금 서울이시죠?" "복직은 하실 건가요?" "애기는 그럼 누가 키워요?"


아기는 누가 키우나. 아무리 자아가 흔들리고 정체성이 무너져도 갓 돌 된 아가를 남의 손에 맡길 순 없었다. 그렇다고 복직을 안 한다는 것은 소위 '경단녀'로, 사회생활을 하던 나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수 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나는 신랑 없는 시댁살이를 선택했다. 애기를 봐주시겠다는 시부모님 말씀이 너무 황송해서 신랑 없이 시댁에 애기랑 둘이 들어가 살아야 한다는 사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일만 할 수 있다면 그런 것이 뭐가 중요해서? 그렇게 나는 모두의 놀라운 시선을 받으며 복직했다. 하루 8시간. '엄마'가 아닌 '00 씨'라고 내가 내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나는 나 자신을 되찾는 것 같았다. 숨이 쉬어지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그렇게 별일 없이 나의 삶이 다시 안정을 되찾는 듯했다.


얼마 후, 처음 문제가 생긴 건 신랑 쪽이었다. 주말에 와서도 차츰 피곤한 기색이 늘던 신랑은 곧 기차만 타면 공황장애가 온다고 했다. 서울-부산을 매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쉬울 리가 있었을까. 그리고 곧 시부모님도 힘듬을 호소하셨다. 주말이라도 아무도 없이 쉬고 싶다고.


그렇게 세 집살이가 시작되었다. 아기가 좀 컸으니 한 주는 신랑이 부산으로 내려오면 그 다음 주는 내가 아기를 데리고 서울 집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신랑이 내려오는 주에도 주말에 시부모님께서 쉬실 수 있도록 부산에 있는 친정집으로 간다. 그러니 평일엔 시댁에, 주말엔 서울 집에, 혹은 친정집에. 집과 집을 전전한다. 이제 물건이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하는 것 정도는 익숙하다. 시댁에 있는 줄 알았던 옷은 어느새 서울 집에 가있고, 서울 집에서 찾다 찾다 친정에 두고 왔다고 결론 내린 물건은 다음 주에 시댁에서 발견된다. KTX고 비행기고 VIP 고객이 되었음은 덤이다. 요즘엔 코로나로 비행기 삯이 싸져서 KTX에 조금 소홀했더니 적립금이 쌓이는 속도가 줄었지만, 여전히 VIP 혜택은 유지되고 있다. 매주 주말이면 짐을 싸고, 싸놓은 짐은 풀기가 무섭게 다시 싸야 하기 때문에 이제 짐 싸는 것 따위는 일도 아니다.


요즘은 다들 집이 이슈다. 집값이 얼마가 뛰었고 전세를 사니 매매를 하니 투기를 하니, 어느 때 보다 집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집을 삶의 터전으로 여기기보다 획기적인 투자처 중 하나쯤으로 생각하는 것이 대세인가 싶다. 그러나 세 집살이를 하는 내게 '나의 집'이란, 한 번쯤은 짐 쌀 걱정 없이 오래오래 머물러 보고 싶은 머나먼 꿈 이자, 그러나 그 꿈을 이루는 순간에는 다른 모든 것을 놓아버려야 하는 최고의 기회비용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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