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섦이 주는 설렘이 있다. 그 설렘은 너무나 큰 나머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새벽같이 집을 나서면 또 다른 새벽이 다가올 한밤중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던 시절. 학교와 학원, 집을 오가는 반복된 일상은 지금 생각해도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바야흐로 PC통신 시대가 왔다.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이 아닌 인터넷 동호회가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고작 같은 반 친구들이 온라인에서 다시 모이는 것이 전부였던 온라인 커뮤니티들이 지역 전체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벙개’라는 미명 하에 낯선 이들과의 만남이 어린 중고등학생들에게도 유행처럼 번져가기 시작할 때쯤, 나도 부모님 몰래 한 벙개에 나갔다. 늘 동년배 친구들이랑 생활하다가 여러 나이가 섞여있는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새롭기 그지없었던 첫 벙개. 얼굴을 보고 나니 온라인 커뮤니티도 불을 붙인 듯 더욱 활기를 띄기 시작하고, 매일매일 그렇게 새로운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마냥 신기하고 재밌기만 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그가 있었다. 3살이 더 많은 그는 동호회에서도 제일 나이가 많았던 그룹에 있었다. 유머러스하고, 하얀 얼굴로 잘 웃었던 그는 명실공히 그룹의 분위기 메이커이자 리더 격이었다. 늘 낯선 사람들을 살뜰히 챙기기도 하고 모든 모임과 대화방에서 빠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에게 따로 대화를 걸어 매일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몇 번쯤, 모두와의 대화 중에 나를 두둔해주기도, 칭찬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금세, 그의 호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공용 대화방이 있는데 왜 자꾸 따로 나에게 대화를 거는 것일까. 미주알고주알 내 일상은 왜 그렇게 궁금해하는 것일까. 그는 무슨 일이 생기거나 고민이 있으면 왜 나에게 따로 공유하는 것일까.
그리고 두어 번의 벙개 후엔 나뿐만 아니라 동호회의 모두가 그가 나에게 호감이 있다고 확신하고, 심심찮게 우리를 커플로 엮어 놀리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1:1대화방에서 그가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매우 중요한 이야기라며 뜸을 들였다.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나는 3살이나 많은 그의 - 그 당시 3살은 거의 그 사람이 아저씨로 느껴질 정도의 나이차였다 - 고백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 너 어제 내 여자 친구 팔찌 떨어트려서 망가트렸더라? 그거 내 고백 선물이었는데.
알고 보니 나는 그의 비밀연애에 동원된 페이크였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가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닌지 의심하게 만들어 그의 진짜 연애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페이크. 나는 그런 존재였으며, 심지어 그 진짜 여자 친구는 나와도 친한 언니였다.
어이없고, 일정 부분 상처도 받았지만 그때 깨달았다. 나는 낯선 이의 호의에 너무나 취약하구나. 사실 정말로 그를 좋아한 것도 아니면서 낯선 누군가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호의를 베푸는 것 만으로 설레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 착각, 낯선 이의 호의에 대한 설렘은 물론 지금도 유효하다. 비행기에서 곤란해하는 나를 대신해 대뜸 캐비닛에서 내 캐리어를 내려준 남자에게 설레고, 길가에서 한참 이야기하는 중인 나의 팔을 당겨 인도 쪽으로 밀어 넣어주는 남자에게 설렌다. 물론 그 배려를 이제 개인적인 호의로 착각하지는 않지만 때로는 머릿속에서 그 뒤를 마음껏 상상하기도 한다. 뭐 어때. 그저 상상인데! 이제쯤엔 그 상상을 즐길 줄 아는 여유가 생겼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