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를 한 대 피운다. 창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앉아있는 것 만으로는 모드 전환이 안 되는 순간이있다. 나에게 담배는 하나의 목적을 가진다. 모드 전환. 뭔가 미묘하게 무기력하고 허전할 때, 그 모든 순간을 묘사하거나 공유할 여력이 없을 때. 그 마음 상태를 벗어나기에 담배 한 대는 순간의 일탈이고, 그 일탈은 제법 유의미한 효과를 가진다.
담배가 어디 있더라. 옷방에 가서 뒤적뒤적, 동거인의 옷을 뒤진다. 공식적으로는 담배를 끊은 그가 늘 비상용으로 담배를 넣어두는 두꺼운 겨울 패딩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에세 프레쉬 1mg. 오. 못 보던 건데. 나름 약한 거 피시네. 나이 드셨나. 늘 이렇게 나의 동거인은 허술하다. 사실 이렇게 적당히 눈감아주는 나를 대상으로 굳이 꽁꽁 숨길 이유가 없어서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상시 흡연자'는 싫어하는 나를 위한 나름의 배려다. 보이지 않는 곳에 두고 가끔만 피는 것. 그렇지만 나는 안 허술하기 위해 내 옷이 아닌 담배가 든 패딩 전체를 으싸, 꺼내 든다. 내 옷에 담배냄새가 남을 순 없으니까.
나를 두 번쯤 감쌀 것 같은 패딩을 껴입고 다용도실 창을 활짝 열었다. 생각보다 초겨울 날씨의 밖이 그리 춥지 않다는 것과 오늘 햇살이 너무 좋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도로변의 차들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백색소음 마냥 끊김이 없고, 옅게 부는 바람과 늦은 오전의 햇살을 받아 살랑이며 빛을 내는 나뭇잎들을 바라본다. 연두였다가, 초록이었다가. 빛바랜 노란색이 나타날 때쯤이면 나무의 머리숱이 제법 적어졌음을 느낀다. 곧 겨울이 되면 민둥민둥 한 장의 잎도 남지 않을 참이지만, 아직은 그래도 적당히 남아 있구나.
한 모금, 두 모금, 이런 생각들을 하며 연기를 내뿜다 보면 이내 어지러워진다. 얇디얇은 담배가 채 반도 줄지 않았는데, 내 몸은 이상신호를 보낸다. 뭐야. 왜 이래. 왜 이런 유독한 연기를 한가득 몸에 들이는 거야.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저항하는 소리가 거의 들릴 지경이다. 아. 오늘의 일탈을 유지하기에 나의 멘탈만큼이나 몸도 상태가 좋지는 않구나. 더 이상 버티기보다는 순순히 몸의 소리를 들어 담배를 비벼 끈다. 일탈의 들뜸이 메스꺼움의 불쾌함으로 바뀌는 것 또한 바라는 바는 아니니까.
최종 결정권이 없는 일이라, 나의 최선이 결과를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할 때 몹시 무기력하다. 그걸 모르고 들인 최선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몸과 영혼을 다 바치는 그 순간에는 거짓말처럼 그 사실을 깜빡한다. 지치지 않을 만큼만, 이 일이 되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을 만큼만 나를 지키면서 최선을 다할 순 없나. 그 최선들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결론에 다다르고 나서야만 강제로 멈춰지는 상황을 반복한다. 그리고 이렇게 무기력에 시달린다. 쿨한 최선. 그런 건 세상에 없나?
알면서도 반복하는 바보짓이 오늘도 헛헛한 마음이 되어 나를 괴롭힌다. 이미 다한 최선에 미련 갖지 않으면 되는 것을. 끝을, 받아들이자. 나는, 이미 어쩔 수 없는 최선을 다한 나를 그저 다독이며 끝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해야 한다. 쿨한 최선이 아닌 쿨한 받아들임. 쿨한 엔딩. 깔끔한 엔딩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