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셋집에서 이사를 나오는 날이었다. 포장이사가 거의 마무리되는 시기쯤 확인차 들린 집에서 이삿짐센터 분들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낯선 사람이 들어오더니 문에서 뭘 뜯고 갔다고. 정말로 문짝에 있던 시트지가 뜯겨 있고, 뜯긴 자리에는 크게 홈이 파져 있었다. 그리고 곧, 주인집에서 전화가 왔다. 문짝을 배상하셔야겠다고.
무슨 소린가 했다. 문짝 위의 시트지는 저희가 붙인 것이 아니다, 이사 왔을 때부터 그랬다고 했는데도 막무가내였다. 자신이 분명히 아는데, 그럴 리가 없다며. 심지어 날더러 집에 잘 안 있지 않았냐며, 남편이 술 먹고 그런 거 아니냐는 막말을 해댔다. 저렇게 문짝이 파이고, 그 위에 정교하게 시트지까지 붙였는데 우리가 설마 기억을 못 해서 그러겠냐, 일부러 거짓말을 하겠냐 해도 다시 생각해보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약속된 시간이 지나도록 전세보증금을 입금해주지 않았다. 보증금을 빌미로 문짝 값을 받겠다는 거다. 당장 이사 들어갈 집에 보증금을 입금해야 하는 상황에서 신랑은 저희가 안 했지만, 정 그러시면 반반 부담하자고 협상을 했다. 그렇게 12만 원을 붙인 후에야 보증금이 입금되었다.
그렇지만 너무 억울했던 나는 기어이 2년 전, 이사 들어오기 전에 인테리어를 위해 찍어뒀던 동영상을 찾아냈고, 그 동영상에서 시트가 떡하니 붙어있는 문짝이 찍힌 장면을 찾아냈다. 그래서 그 동영상을 주인집에 전송했다. 잠시 뒤, 띠링, 하고 휴대폰이 울렸다. 12만 원이 입금되는 소리였다. 오해해서 미안하다, 죄송하다 소리 한마디 없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보일러 계량기를 확인하러 다시 들른 자리에서 그 주인을 마주쳤다.
- 여기 근처 00집 2층으로 이사 가신다면서요~ 거기는 더 넓어서 좋겠어요~ (웃음)
너무나 당당했다. 그렇게 소리 지르며 세 번 네 번을 통화한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무 일도 없다는 투였다.
- 동영상 보내드린 거 보셨죠?
- 네~ 돈 붙여드린 거 확인하셨죠? 넓은 집이라 거기는~ (블라블라)
그 뒤로 그 여자가 한 말은 기억조차 없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을 후회한다. 받을 필요 없는 오해를 받았고, 오해를 빌미로 한 협박(?) 덕에 곤란에 처했다. 사과를 받을 이유가 충분했는데도 상대방이 후안무치하게 유야무야 넘어가려 들면 나는 당당하게 사과를 요구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그런 시답잖은 대화를 마무리한 뒤 자리를 떴다. 왜 였을까.
다시 곱씹어 보면, 사과를 '나이스 하게' 요구할 만큼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이 가장 컸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피해를 보고 사과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까지 '나이스'함을 찾았어야 했을까. 아니 지금 뭐하시는 거냐고. 그렇게 막말을 하시고 사과 한마디 없으시냐고 따졌어도 되지 않았을까. 왜 화를 내도 되는 상황에서는 화를 내지 못 내는 걸까.
이 사건이 발생한지도 벌써 2년이 흘렀다. 그렇지만 저 사건에서 해결하지 못한 나의 분노 타이밍 상실 병은 아직도 유효함이 증명되는 사건이 최근에 또 일어났다. 내가 충분히 잘하고 있는 일에 대해 질책을 당했고, 부당하다고 당당히 화를 냈어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또 사고 회로가 멈췄다. 그래서 잊고 있다고 생각했던 2년 전 이 사건이 불현듯 다시 떠올랐다. 아. 나는 저 상황에서 한치도 나아가지 못했구나. 그래서 이렇게 굳이 헤집어 다시 써 본다. 나는 또다시 이런 상황을 맞닥드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이스 하게 화낼 수 없다는 이유로 또 머리가 새하얘진 채로 아무것도 못할 건가. 이제는 한발 더 나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