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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siseon Mar 29. 2022

말을 하는 것, 하지 않는 것

나에겐 매우 가까운 지인들이 있다. 여기서 '매우' 가까움이란 마음속에 드는 생각을 거의 뇌를 거치지 않고 이야기해도 무방한 수준의 대화가 가능한 이들이다. 최소 10년 이상의 관계들이고, 그래서 지리적 위치에 관계없이 언제든 전화 버튼을 누를 수 있는 귀한 인연들이다. 


말을 하고 있지 않아도 생각이 들리고, 말을 하고 있는 와중에는 듣지 않아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할지 예측이 가능한 대화들. 그런 대화가 주는 위안이 있다. 뭐랄까, 대단한 애를 쓰지 않아도 생각이 동기화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편리하기도 하거니와 매우 안심이 된다. 뭐라 말로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이러저러한 나의 상태라도 (아직은) 누군가에게 이해가 될 수준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안심..이랄까. 그러니까, 세상에 나를 이해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생을 놓지는 않을 수 있다던 누군가의 말이 문득 떠오르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말을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을 생각한다. 너무도 가까운 사이니까. 그래서 예측 가능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을 조금은 줄여볼까 하는 마음. 너무도 나를 잘 알고 아끼는 그들이 하는 말들 하나하나가 보통은 큰 위로, 그 자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처가 되는 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런 말들이 필요해서 늘어놓은 말들이라 예상한 상처를 굳이 찾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나는 늘 듣는 쪽 보다는 말을 하는 쪽이었으니 내가 받은 상처보다는 준 상처가 더 많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최근에 섣부른 대화로 지인의 오랜 상처를 건드린 탓이다. 그녀는 오히려 고맙다고, 아프지만 반드시 알았어야 했던 것이라며 웃어 보였지만 나에겐 시뻘겋게 드러난 그녀의 상처가 고스란히 보였다. 오, 맙소사. 내가 뭐라고. 굳이 말하지 않았더라도 보통은 말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답을 찾았을 문제들일 텐데. 혹은 그렇게나 정확한 칼로 베어내지 않고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이야기였을텐데. 조금 취해있었다는 변명으로는 내뱉은 말에 대한 후회가 쉬이 가시지 않는다. 


섣부르게 감정을, 생각을 던지지 않는다. 누군가들이 나를 위해 배려했을, 끝없이 삼켜 넘겼을 그 마음들을 떠올리며 토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것 같은 말들을, 그 오랜 습관을, 삼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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