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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siseon Mar 28. 2022

심리학의 쓸모

나에게 심리학은 말 그대로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이었다. 인간의 심리 상태, 메커니즘 등의 특징을 밝히고 이를 유형화, 혹은 이론화하는 학문. 그에 따라 인간 행동을 예측하고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학문. 이 정도로 이해했던 것 같다. 


그런데 최근 한 심리 상담사와 사적으로 이야기하다가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시작은 나의 질문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 인정 욕구가 있다고 누군가 지적하고, 이를 내가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자. 이 과정에서 나는 내가 왜 그렇게 인정에 민감하게 되었는지를 나의 삶의 과정을 돌아봄으로써 - 인정이 필요한 시기에 인정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던지 -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나의 질문은 그다음이었다. 이해하고 나면 그다음은? 이해를 한다는 그 자체가 물론 심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인정 욕구를 덜 민감하게 하거나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의 해결책이 되어줄 수 있느냐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러니까 '이해'를 하고 나서, 그다음은 단계는 무엇인지가 나의 질문이었다. 


그리고 상담사님은 나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내면 아이'의 개념을 짧게나마 설명했다. 원인을 밝혔다면 그 시기의 나인 내면 아이로 돌아가 그 아이를 돌보아 주고, 그 아이가 충분히 치유받도록 함으로써 소위 문제의 상황을 해결한다고. 그리고 상담사님은 한 문장을 덧붙이셨다. 그래서 사회 구성원으로 생활하는데 문제없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 심리학의 목적이라고. 


그러니까 사회 구성원으로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정도의 상태를 만드는 것에 상담의 목적이 있다는 것은 물론 상담사로서의 오랜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자조적 표현, 혹은 농담에 가까웠는지 모른다. 물론 그것이 심리학이 가지는 목적의 전부 일리도 없고. 하지만 나는 상담사님의 그 자조 섞인 표현을 통해 심리학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일차적 위로, 혹은 위안의 수준에 그치는 것에 대해 크게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고유의 색을 가진다. 매 분, 매 초 천 갈래 만 갈래의 삶의 경로를 통해 개인이 획득하게 되는 것은 역시나 천 갈래 만 갈래 자신이 가진 경험과 생각의 씨앗에 의해 무한한 경우의 수를 만들어 낸다. 그 고유의 색은 굳이 보편화되거나 이해 가능한 수준으로의 일반화 과정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자의 고유함을 잃지 않는 것이 개인의 삶에서 더 중요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과연 우리는 그 모든 경험과 결핍으로 인해 빚어진 자신만의 색깔을 충분히 존중하고 있는가. 혹은 섣불리 '사회적으로 무난하고, 보편적이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수준'의 자아를 만들기 위해 (비약하자면, 심리학을 통해 통용화된) 사회의 기준과 판단에 나를 맞추려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소소한 대화에서 생각지 못하게 얻은 큰 화두다. 내가 스스로의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는 모든 노력의 방향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한 감사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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