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내면과 대화하는 것이다. 가장 고독한 채로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 그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일종의 인간 존재에 대한 경이, 믿음이기도 하다. 갓 태어난 아기는 이미 일생을 살아낸 노년의 인간만큼이나 완벽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미 가지고 있는, 완벽한 그 내면의 세계를 혹자는 늘 들여다보기도, 혹자는 평생 단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심오하길래. 얼마나 완벽하게 무엇이 있기에 평생을 두고 아무리 보아도 그 끝이 없는 것일까. 인간 존재 한 명이 가진 그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완벽한 우주이다. 그리고 그 초입에서 혼란스러워만 할 것인가. 우주의 한가운데 서서 그 끝없는 광활함에 몸을 맡기고 마음껏 그 무한을 누릴 것인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선택이다.
예술작품, 창작의 의미는 그것이 무엇에서 기인하였는가 이다. 생명의 원천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글을 쓰지 않으면, 창작활동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자들이 자신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분출되는 무언가를 그저 외부로 형상화시키는 것. 그것이 작품이며 그래서 누군가의 내면으로부터 나온 창작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이고 세계다. 그 창작물은 창작자의 우주를 일부 훔쳐볼 수 있는 클루인 셈이다.
"당신이 자꾸만 바깥 세계만을 쳐다보고, 당신의 가장 조용한 시간에 당신의 은밀한 감정을 통해서나 답해질 수 있는 성질의 질문들에 대해 외부로부터 답을 얻으려 할 때처럼 당신의 발전에 심각한 해가 되는 것도 없습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카푸스에게 쓴 편지에서(1903.2.17)
자신의 말과 행동이 '필연성'에서 오지 않을 때, 인간이 가진 그 모든 것과 행위는 가장 나약한 형태를 띤다. 왜 그것을 해야 하는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이 모든 것은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주는 당위성, 필연성을 가져야만 그 힘이 가장 강력하다. 그럴 때는 더 이상 외부의 시선과 평가가 중요 할리 없다.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의 필연성을 가지고 행했나 하는 것. 자신이 그르다는 것이 밝혀지면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옳을 때는 더욱 그 자신을 믿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원천이 나에게서 기인한 것이 아닐 때, 그 결과를 받아들이고 책임지는 일은 더욱더 어려워진다.
모든 것의 답은 이미 내가 가지고 있다. 그것을 알아차리고 드러내는 법을 모를 뿐. 나는,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의 완벽한 우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