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사고방식도 바뀐다는 건 외국어 공부를 깊게 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느껴봤을 거다. 문화에 따라 언어의 어순이나 어조가 형성되기에 모국어가 아닌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문화에 흡수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에서는 언어 학자인 루이스가 외계 생명체의 언어를 배우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정체 모를 외계 생명체들은 원형의 표시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고, 그 언어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벌어지는 시제를 나타내고 있었다. 루이스는 그 언어를 연구하고 배우면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마주하게 된다. 그들의 문화에 흡수되어 버린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언어 체계를 가진 외계인들이다. 각자의 사고 방식과 살아온 과정이 담긴 고유의 어조와 언어들이 있고, 우리는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그것을 끊임없이 익혀야 한다. 각자의 언어는 말뿐 아니라 글에서도 드러난다. 범죄자를 추적할 때 치아나 지문 등 단 한 사람을 추정할 수 있는 고유의 단서들, 즉 '시그니처'가 있는 것처럼 글에도 단 한 사람을 분별할 수 있는 시그니처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시그니처는 말을 하면 할수록, 글을 쓰면 쓸수록 강화된다. 그리고 그 말과 글을 통해 계속해서 사고 방식이 변화하기도 한다. 시를 쓰는 사람은 시적인 사고를 하게 되고, 소설을 쓰는 사람은 소설적 사고를, 에세이를 쓰는 사람은 에세이적 사고를 하게 된다. 글을 쓸 때 선호하는 장르가 있다는 건 그 사람의 사고나 언어 체계를 담을 수 있는 적합한 틀을 본능적으로 찾게되는 것일 거다.
나는 한때 시나리오어를 사용했다. 내가 영화를 하고 싶던 이유는 어떤 걸 기억하고 느낄 때 그 현상이나 사실보다는 이미지로 기억하고 느끼기 때문이었다. 극적인 감정의 동요를 느끼는 찰나의 순간이 사진이나 영상이 찍히듯 머리에 남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거나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학과에 가서 원없이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고, 내 시그니처는 더더욱 강화되어 생각을 이미지로 하는 습성이 굳어졌다.
그러다 소설이라는 언어를 사용해보고 싶어서 시도해봤지만 어쩐지 나의 언어 체계를 담기에 약간은 부적절하단 느낌을 받았었다. 나는 섬세한 디테일에 약하고, 이미지에 강해서 소설을 써도 어딘가 시나리오 같았다.
시나리오는 분명 많이 써봤는데도 쓰고자 하면 불편했다. 대학교때 너무 시달려서 PTSD일 수도 있고, 나의 언어를 담기에 사실은 어떤 부적절함이 있을 수도 있고.
그래서 한동안 글을 잘 쓰지 않다가 최근 에세이라는 언어를 사용해보기로 했다.
어느날 다시 글을 쓰려고 키보드에 손을 얹었는데 나에 대한 얘기를 하고자 하니 너무 쓸 얘기가 없었다.
분명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간 세월들도 아니고, 가끔 익사이팅하고 임팩트 있는 사건 사고들도 있었을텐데도 할 얘기가 없었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다. 나는 개인적인 얘기를 자연스럽게 할만큼 솔직하지도 않으며, 세상의 흐름을 마음으로 한 컷 한 컷 담아놓을 만큼 감상적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적절하게 꺼내어 얘기할 수 있는 언어를 아직 찾지 못했었다.
에세이는 장르이지만 언어라고 생각하고 접근하기로 했다. 나만 가질 수 있는 세계관과 사고로서 일상 혹은 삶을 말하고 독자를 그 세계로 흡수시키는 언어. 에세이를 쓰기로 하면서 주마등처럼 살아온 과정을 훑었다.
여러 에피소드들이 머리를 스쳤고, 정돈되지 않은 언어로 뒤죽박죽 섞였다. 나에게 벌어진 일을 나는 어느 방향에서 어떻게 바라보았고, 누구를 향해서 말하고 싶은가? 그리고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나만의 시그니처는 무엇일까? 그건 어디에서 연유된 것이고?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때론 불손할 것이고, 때론 아리송할 것이며, 때론 고요할 것이다. 누군가 루이스처럼 그 언어를 배우고 그 언어대로 사고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 비로소 글쓰기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이 형성한 나만의 언어를 빨리 많은 이들에게 들려줄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