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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로소 Jun 19. 2020

봄날의 선생님


봄날의 선생님


최정미


창밖으로 듣는 눈 소리가 마음을 조용히 두드릴 때면 그리운 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돋는다.


먼저 알아본 이는 선생님이셨다. 하이얀 병원복 속의 소녀 같던 얼굴이 파리해져 나는 한참을 보고서야 눈물이 터졌다.


산수유가 노랗게 꽃망울 피우던 봄, 아이를 처음 유치원에 보내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어 유난히 한껏 들떴던 봄에 마주했던 선생님은 유리벽 너머 눈으로 나를 먼저 알아보시고는 무척이나 반가워하셨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웃음만 보이고 오겠다는 내 다짐과는 다르게 내 몸 어디에 그 많은 눈물이 있었을까 싶을 만큼 그렁그렁 하던 눈물은 주르륵주르륵 흘러내려 말을 잇지 못하고 바라만 보는 찰나 선생님은 웃으며 내 이름을 부르셨다. 너무도 반가워하시며 웃으셔서 마음이 애달팠다. 그 미소가 아니었으면 온통 하얀 환자복에 새하얀 마스크로 반이 덮인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을 텐데. 마스크 사이로 비집고 나온 나를 향한 웃음이 어린아이 마냥 또 너무 좋아서 울다가 웃음 지어 보였다. 내 아이 이름을 기억하시며 아이는 잘 있냐고 당신이 그리 아픈데도 내 안부, 아이 안부까지 물으시는 모습이 왜 그리 서글퍼 눈물이 나던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유리벽에 손을 대고 전화 수화기를 들어 안부를 묻는 영화와도 같은 장면이, 선생님과 내가 그 장면 속에 서 있는 것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내가 나가면 밥 사줄게.”


믿고 싶었던 그 약속이 몇 달 만에 허공으로 사라져 버릴 줄은 몰라서 그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건만.


무작정 보고 싶은 마음에 병실 호수도 모르고 찾아가 물어물어 간신히 층수만 알아내어 올라가서 보니 무균실 병동이었고 환자가 나오지 않으면 면회가 힘든 상황이었다. 사물함의 이름을 찾아 가만히 만져보다 창가에 앉아 쪽지라도 전해야겠다는 마음에 글을 써 내려가던 참이었다. 정말 기적과도 같은 우연으로 선생님을 면회 온 친척을 만나러 나오셔서는 조우하게 되었다. 우리 서로 믿기지 않는 모습에 말없이 한동안 서서 바라만 보던 그 숨 막히던 봄날.


선생님은 구연동화를 가르치는 분이었다.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 주다 보니 그림책의 매력에 빠져 구연동화를 배워보려던 참에 설렘을 가슴 가득 안고 동화를 배우러 갔다. 푸릇푸릇한 봄의 기운을 지닌 공원을 지나노라면 노랗게 핀 산수유가 새초롬하니 수줍게 피어 있었다.


동화를 배우러 가니 시를 읽어 주셨다. 내가 시를 읽은 지는 정말 까마득히 오래전이었다. 결혼 후 육아와 살림, 집안 대소사에 적응하기도 바빴던 내게 단비 같은  시 구절들이 쏟아졌다. 수업을 들으러 갈 때마다 읽어 주시는 한 장의 시들이 그렇게 삶을 아름답게 해 줄지 몰랐다. 마치 잃어버린 나를 다시금 만나는 것만 같았다. 그 당시 집안의 대소사로 우울하고 힘들었던 내게는 화요일마다의 시와 구연동화 수업이 세상을 아름답게 밝혀주는 등불과 같았다. 나는 차츰 밝아졌고 다시 나를 되찾아가게 되었다. 그런 인연을 맺은 선생님과의 동화 구연 수업 후 나는 도서관에서 많은 어린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 주었고 덕분에 내 아이도 책과 도서관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라났다.


항상 고운 말투와 온화한 웃음, 따뜻한 성정으로 대해주셔서 저분과 같이 살도록 참으로 노력해야겠다 다짐했는데 하늘은 무심하게 고운 분부터 부르시고 말았다.


하얀 병원에서 다시 만난 그 봄, 선생님은 또 그토록 환히 웃어주었는데 그 봄은 이제 어깨를 늘어뜨린 채 저 멀리 지나고, 겨울이 다시금 찾아왔다.


또 봄이 오거들랑 내 선생님과 마주했던 그 봄날 같기를 소망해본다. 별을 닮은 개나리가 피어나고 고운 산수유 꽃들이 봄바람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를 바란다. 내게 아름다운 시를 들려주시던 그리운 선생님이 봄바람에 슬쩍 오셔서 내 가슴에 고이 지내다 가셨으면 하고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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