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노는 것도 장인정신이외다
여름이 아주 끝나갈 무렵 같이 사는 분과 오사카 교토로 일주일 여행을 다녀왔다. 올해 퇴사를 한 것과 별개로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고 그 힘든 일이 가까스로 봉합되고 있었고 이사도 했고 고양이 한마리를 임보했고(이 녀석은 결국 영구 보호하게 되었다), 여하튼 변화가 많은 해여서 그런가(별로 상관없는 얘긴 거 같은데?), 치앙마이에서 돌아오면 여행 한번 짧게 쨕!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마침 남편도 얼마간 시간이 생겼다. 바쁜 여름을 보냈던 그분도 어디론가 몹시 떠나고 싶어 해서 내 작고 소중한 퇴직급여에서 얼마를 떼어내 호강을 시켜드렸다. 신랑은 여행 내내 호강지처가 좋더라~하고 노래를 불렀다지...
오랜만에 남편과 일주일을 붙어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마츠다부장님부터 오사카 유투버들 채널을 모두 섭렵했다. 맛집 리스트를 정리하고 동선을 짜고 머릿속으로는 이미 여행을 여러 차례 다녀왔는데, 출국 하루 전날 몸이 으슬으슬하더니 대차게 감기에 걸려버렸다. 감기를 건네주신 그 분은 얄밉게도 출국 날이 되니 쌩쌩한 모습이었다. 여행 흥을 망칠 수 없어서 정신을 부여잡고 돌아다니긴 했지만, 그 좋아하는 술 한방울 먹을 수가 없었다. 연신 나마비루(생맥주)를 외쳐대는 인간을 바라보며 여러가지 감정이 들었지만, 이게 사랑은 사랑인지, 그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좋긴 했다.
그러다보니, 이 친구가 나마비루를 가장 격렬하게 외치던 순간이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그 날은 여행 첫날이었고, 나는 약을 때려넣고 몽롱해진 몸 상태로 없는 힘을 쥐어짜내고 있었다. 저녁으로 카레집을 데려 간다더니(본인이 앞장 서겠다고 했을 때부터 불안했다. 먹는 데 진심이 아니라 그런지 식당을 매우 못고르는 편) 카레 냄새가 전혀 나지않는 어떤 가게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오지로 여행을 간 것도 아니였것만 모두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돌아나가지 못했고, 그대로 얼떨떨하게 자리에 앉아버렸을 때, 그때 요시상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요시상. 그는 머리가 반짝이기 시작한 귀여운 중년 남성이었고, 거의 30년간 이 집에 나마비루를 먹으로 오는 무역회사 중역이었다. 요시상 말고도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시모상, 무라사키짱, 미키짱, 우다짱 등...) 이 집의 오래된 단골이라고 했다. 그 친구들이 가족같이 환대해 준 덕에 신랑은 난데야넨(오사카 만담에서 유명해진 방언이라고 한다. 우리말로 하면 뭐라카노~ 같은?)를 외쳐대며 저세상 텐션으로 가고 있었고, 나도 상태가 이 지경인 것 치고는 무알콜맥주로 정신을 부여잡고 신나게 놀았다.
오사카 사람들은 부산 사람들이랑 비슷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화통하고 개그 부심도 엄청나다고 했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모두가 친절하고 유쾌했다. 그 유쾌한 친구들이 이렇게 매일 밤 모인다는 게 부럽기도 했다. 내가 어릴 때 경도 되었던, 미드 How I met your mother 주인공들의 라이프스타일처럼 일하고 퇴근해서 놀아재끼는 삶을 그들은 몇 십년째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곧 30년은 너무 긴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일본의 진득한 장인 정신은 노는 데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 웃다가, 작은 일과 작은 행복을 매일같이 반복하는 것에 골똘히 생각해보게 되었다. 좋다 나쁘다 나눌 수 없는 삶의 반복적인 미학에 대해서. 저게 무슨 인생이야 싶은데 또 다름 아닌 저게 인생인 것 같은, 그런 작은 일상에 대해서.
그런 미학이 내 일상에도 있었다. 남편과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낄낄대는 일, 저녁에 만나 같이 저녁을 먹고 가끔 술도 먹고 아주 가끔 클럽도 가지만 무얼 하든 쉬지 않고 두런두런 신나게 입을 놀려대는 그런 일상. 고양이를 쓰다듬고, 좋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일상. 30년이나 계속 할거라고? 생각하면 너무 지루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소한 일상들. 육중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쇄말한 것의 반복이기 때문에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것들.
한국에 돌아오고 마마짱이 마스타로 있던 그 가게로 감사 편지와 선물을 보내야지, 하고 다짐했지만 3개월이란 시간이 훌쩍 흘러 겨울이 되었고 게으른 성정에 그 다짐은 거의 잊혀져 버렸다. 요시상과 마마짱과 친구들은 이제 우리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가끔씩 그들이 생각난다. 그래도 인생 뭐 한방 있어야 되는거 아니야? 이거 너무 지루한거 아니야? 할 때마다. 요시상이 출근하듯 하루도 빠짐없이 가게에서 친구들과 보냈다던 30년의 시간이 떠오른다. 자그마치 30년. 그 30년을 말할 때 요시상은 행복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