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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째붕이 Mar 21. 2023

잠깐, 제 엉덩이는 제가 뚜둥길게요

당신 엉덩이는 당신이 뚜둥기세요

 엉덩이를 만져본다. 살이 쪄서 제법 둥글둥글한 게 뚜둥기기 딱 좋게 생겼다. 엉덩이를 다루는 법은 여러 가지지만 엉덩이는 정해진 방법으로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찰싹 치거나 부드럽게 만지거나 움켜잡아서는 안 된다. 엉덩이는 밑에서부터 위로 가볍게 토닥토닥 두드려야 한다. 엄마 등에 업힌 상상을 하며 스스로를 어부바하듯 천천히 애정을 가득 담아 두드려야 한다. 마음이 싱숭생숭하거나 힘이 없거나 지독하게 외로운 날엔 가끔씩 이렇게 남몰래 제 엉덩이를 토닥거려 본다. 누군가에게 실망을 했거나 혹은 실망을 줬거나 스스로가 형편없게 느껴지는 날에도 화가 나서 등이 다 젖도록 땀이 씩씩 나는 날에도. 한참을 토닥거리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가라앉는다. 당신도 나처럼 엉덩이를 토닥여야 한다.


 엄마 등에 업힌 상상을 하라고 하였지만 보통보다 못한 수준의 기억력을 가진 나에게 그런 기억이 있을 리 없다. 보통의 기억력을 가졌거나 남들보다 특별히 오랫동안 귀염 받지는 않은 보통의 당신이라면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각자의 엄마 등 위로 수천 번은 업혔을 테고, 다리로도 기억을 한다는 문어선생처럼 우리의 엉덩이 곳곳에는 엄마가 등 뒤로 손을 뻗어 조용히 토닥이는 따뜻한 손길이 신경 깊숙이 남아 있을 것이다. 엄마 품에 안겨 다독여진 기억 역시 우리 등 곳곳에 남아 있을 테니 위로가 필요할 땐 등을 쓸어내리는 것도 도움이 된다. 사실 내 경우엔 등을 동그랗게 쓸어내는 것이 더 효과가 좋지만 등에는 손이 닿지 않으니까. 꿩 대신 닭이다.


 성장하며 생기는 나이테처럼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우리 가슴에는 연하고 진한 흉이 생긴다. 나의 경우, 골목을 한 줄로 막아선 동네친구들의 따돌림이나 세상 전부인 줄 알았던 남자친구와의 이별, 새까맣게만 보이는 진로를 앞에 둔 막막함 같은 것들이 지나간 자리가 성장의 고비를 넘은 흉이 되었다. 그 흉이 아직 상처였을 때, 나는 그 상처를 바라보며 나를 한아름 안아줄 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거창한 위로나 조언 말고, 그저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꼭 안아줄 평범한 반창고 같은 품 말이다. 그런 품을 기대하며 벌어진 상처를 손바닥으로 누른 채 옆에 있는 엄마를 바라보면, 엄마는 나를 멀뚱멀뚱 쳐다만 보거나 아니면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는 때가 많았다. 나한테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가장 위로 받고 싶을 때 가장 멀어지는 사람, 내 슬픔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


 엄마는 나한테 그런 사람이잖아요. 하고 말하면 바로 반격할 엄마의 목소리가 80km를 한달음에 내질러 내 귀에 꽂힌다. “내가 첨부터 그랬겠니. 가만 냅두면 울지도 않고 잘 노는데, 너는 좀 안아보려고 하면 바로 칭얼거렸어. 쪼끄만 게 쌀쌀맞기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서는.” 그렇다. 날 때부터 쌀쌀맞은 년. 그건 엄마가 말하는 나였다. 안아 주고 싶을 때 가시 돋치게 밀어내는 사람. 나는 엄마한테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무심한 엄마와 까칠한 딸. 한 장면에 그려보면 서로 멀찌감치 반대쪽 구석에서 데면데면하게 서 있을 것 같지만 우리는 제법 친했다. 사실 제법 친한 정도가 아니라 어떤 때는 이 세상에 서로 밖에 없는 것처럼 가장 친한 친구처럼 지냈다. 그 어떤 때란 보통, 서로의 인생이 꽤 순탄하게 흘러가 별 다른 일이 없을 때였다. 그러다 별 일이 생겨 고민이 깊어지고 울고싶어지는 때가 오면 어떤 마음이 톡 하고 서로를 건드려 저항 없는 바닥 위를 미끄러지듯 반대 방향을 향해 저 멀리 빠르게 멀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가 나 홀로 내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리는 때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익숙하게 실재하는 엄마를 저 멀리 밀어 두고 기억도 나지 않는 가상의 엄마를 그리워하며 제 홀로 제 엉덩이를 뚜둥긴다.


 차량 맞게 왜 혼자 엉덩이를 두들겨 대세요? 주변에 사람 없어요? 하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이제는 누군가에게 슬픔과 힘듦을 토로하는 일이 쉽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소심한 변명을 하며 궁싯거릴 것이다. 각자 인생의 무게에 힘들어할 누군가에게 내 걱정까지 얹는 것이 민폐처럼 느껴져서, 이제는 그것이 미안한 일인 줄 알 만한 나이는 되어서 그렇다고.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어른스러운 이유라기보다는 어릴 시절 그 민폐를 끼치다 지겹다는 (말은 안 했지만) 따끔한 충고에 크게 한방 쏘이고 나서 나이 든 인간의 가장 큰 문제인 과도한 방어기제가 발동했기 때문인 이유가 더 클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어찌 됐건 차량 맞게 엉덩이를 혼자 토닥거리다 이 격정이 술안주거리가 될 만큼 누구러진 다음에는 물론, 기껍게 친구들의 도움을 받는다.


 알겠어요. 알겠어. 근데 왜 우리한테까지 엉덩이를 두들기라고 강요하는 건데요? 하고 다시 묻는다면, 나는 더 이상 궁싯거리지 않고 당당히 말할 것이다. 우리가 제 엉덩이를 부단히 토닥여야 되는 이유는, 토닥거려지지 않은 수많은 좌절이 모이면 세상 전체가 슬픔과 분노에 잠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특히 요즘같이 서로가 촘촘하게 연결된 세상에서는 슬픔과 좌절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빠르게 전염되니까 말이다. 우리 모두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에서 수많은 혼돈과 좌절이 에블린의 딸 조이의 머리 위에 무시무시한 베이글을 만들어낸 걸 목격하지 않았는가(무시무시한 베이글을 못 보셨다면 올해 오스카 작품상 수상작인 이 영화를 한번 꼭 보시길 추천한다). 그러니 우리 각자에게는 우리의 슬픔이 세상을 망치지 못하도록 각자의 감정을 토닥이고 또 토닥여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엉덩이를 두드려야 하는 세 번째 이유이고 셀프 엉덩이 토닥에는 더 큰 이유가 있다.


 인간이 감정을 탑재하고 있는 한 어떤 누구도 위로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강철 멘탈 소유자가 아니라면 위로는 밥만큼 중요한 문제다. 그럼 위로는 누구에게 받아야 할까? 가족, 애인, 친구? 아쉽지만 나에게 참된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뿐이다. 위로도 셀프인 야멸찬 시대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릴까 연대와 연결의 힘을 무시하는 것으로 읽힐까 두렵지만 아쉽게도 사실이 그렇다. 타인이 나와 그 사이의 심연을 건너와 내 영혼을 다독여 줄 수 있다고 기대하는 건 나에게도 그 타인에게도 가혹한 일이다. 서로 다른 유전자와 성장배경 그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는 사고방식을 가진 타인이, 물리적인 세계만 공유하고 있을 뿐 전혀 다른 우주에 살고 있는 타인이 그 우주를 넘어와 전지전능하게 나를 헤아리고 적시 적소에 필요한 말과 행동을 해주길 바라는 것은 도를 넘는 일이다. 우리 모두 선 넘는 위로를 바라다 실망하고 상처만 깊어진 경험이 있지 않은가. 위로의 실패를 사랑의 실패로 읽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것이 사랑의 정수이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아무리 들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오히려 우리 쪽에서 주는 편이 났다. 사랑의 정수는 늘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있으니까.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줄 줄도 알듯 나를 다독여 본 사람이 남도 다독일 수 있는 법이고, 거기에 또 우리가 각자의 엉덩이를 열심히 두들겨야 하는 이유가 있다.



다소 두서없이 얘기한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자그마치 25년 전 웅변학원 연단에서 연습했던 기억을 끌어모아 잠시 큰 소리로 읽어 보려고 하니, 지면을 뚫고 나올 목소리에 놀라지 않기를 바란다.


첫째는, 나를 위해

둘째는, 내 소중한 사람을 위해

셋째는, 세상을 위해

우리 모두 제 엉덩이를 열심히 뚜둥길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이 많이 부치는 날엔 내 의지와 상관없이 80km 떨어진 곳에 있는 진짜 엄마가 내 옆에 나타나 어깨라도 한번 토닥여주길 마음 깊이 바랄 때가 있다. 엄마한테 맡겨놓은 위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 우리 사회가 여자에게 성녀와 창녀 사이에 너른 지대를 마련해 주지 않듯이 나 역시 엄마라는 존재에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며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다는 걸 안다. 마치 그가 나에게 마더테레사 급의 사랑을 퍼주어야 할 의무가 당연히 있는 양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주 힘들 때, 아주 가끔은, 그렇게 입바른 소리를 하는 내면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어린 시절의 나처럼 세상 가장 슬픈 사람의 얼굴을 하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엄마를 목 놓아 부르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얼마나 간절히 원한단들 우리 엄마는 여전히 그런 나를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결국 그런 엄마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은, 그가 내 등과 엉덩이에 남겨준 사랑의 기억 때문이다. 파랗게 슬픈 날도 벌겋게 화나는 날도 노랗게 억울한 날도 위로받던 기억을 문지를 수 있어 난 얼마나 복된 사람인지. 그런데 우리 엄마도 그럴까? 우리 엄마도 나처럼 등과 엉덩이에 사랑의 기억이 남아 있을까? 사랑과 위로에 저렇게 서툰 걸 보면 왠지 그런 것 같지 않다. 우리 외할머니의 유별난 아들 사랑을 보건대—다른 집들도 마찬가지겠지. 할머니들의 아들 사랑을 보자면 기괴해서 슬프기까지 하다— 우리 엄마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을 수도 있다는 쪽으로 더 확신이 간다. 그래도 하나뿐인 삼촌이 막내아들인 걸 감안하면 우리 엄마도 등에 업힐 시간이 조금은 있었을 것 같은데…. 3살 터울이라 너무 짧았을까? 나는 엄마가 아기였을 때를 상상하며 할머니 품에 안기고 등에 업힌 시간이 조금은 길었길 60년도 더 지난 지금에 와서 간절히 바라본다. 나는 멀찌감치 그와 떨어진 곳에서 그가 느꼈을 외로움을 헤아려본다. 내가 모르는 쓸쓸함을 상상해 본다.


아무래도 다음 주에는 울 엄마 등 한번 쓰다듬어주러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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