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면직 그 결심의 순간
예전에 일요일 아침이었던가에 했던 이휘재의 인생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이휘재가 주먹을 불끈 쥐며 ‘그래 결심했어!’ 하고 외치면 화면이 두갈래로 쪼개지고, 각각의 선택에 따라 걷게 될 인생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는 매주 일요일, 티비 앞에 빨려 들어갈 듯 앉아 홀린 듯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이휘재는 선택 한번에 영판 다른 사람이 되거나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됐다. 대한민국 지상파 예능을 통해 처음 접한 평행우주론은 이후 나에게 미약한 공포증을 선사했다. 선택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것이라니. 선택 한번에 인생이 바뀐다니.
공포증이 공포에서 끝나지 않고 깨달음으로 이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매일같이 마주하는 선택이 단지 시련이 아니라 더 나은 인생을 얻을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깨달음 대신 장애를 얻었다. 놓친 선택에 더 좋은 결과가 따르면 어쩌지 전전긍긍하는 지독한 선택 장애. 특히 메뉴 선정에 있어서는 그 정도가 중증 수준이었다. 이 메뉴를 골랐는데 알고보니 저 메뉴가 더 맛있으면 어쩌지 애가 달아, 나는 메뉴판을 앞에 두고 30분 후 얻게 될 최선의 미래를 위해 의식을 집중했다. 이 순간 내가 가장 원하는 것과 이곳에서 제일 잘 하는 것, 메뉴 간 최상의 조합을 섬세하게 따지며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해 메뉴를 골랐다. 그 시간을 아낀 다른 우주의 내가 얼마나 호의호식 할지는 한번 생각해 보지도 못한 채, 현 우주의 나는 그동안 밥 하나만큼은 기똥차게 잘 먹었다.
메뉴 하나 고르는 데 터무니 없는 시간을 쏟았으니 다른 상황에서 보이는 선택 행동 역시 우수할 리 없었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앞에 두고는 선택장애를 넘어 선택불구자가 되었다. 현재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하지도, 내 성향과 능력을 고려해 어떤 일이 나와 더 맞는지도 따져보지도 않았다. 선택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겁이 났고, 선택하지 못한 결과를 생각하는 것은 더 공포스러웠다. 나 따위가 지금 여기서 여러 가능성들을 분석한다고 해서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쏟아지는 변수에 압도된 나는 선택을 운이라고 이해했다. 그 결과, 진학이라든지 직업이라든지 인생의 중요한 선택에 있어서는 메뉴 선정에 쏟는 혼신의 절반도 쏟지 못한 채 주변의 소란과 인생의 조류에 모든 결정을 맡겨버렸다. 조류에 쓸려 온 자리에서 눈을 감고 남들이 웅성거리는 곳을 향해 걸었다. 잠시 눈을 뜨고 다른 길을 바라볼 때도 있었지만 타인의 도리질에 겁 먹은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던 내가 삼십대 중반을 지나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외치게 된 것이다. “그래 결심했어!”
비장하게 외치던 그 때에 나는 말단 행정기관에서의 권태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중앙 행정기관으로 전입을 신청해 서류와 면접 심사를 거쳐 최종 합격통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질간질한 합격의 느낌을 감지한 나는 곧장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워라밸이 보장되지만 그와 함께 소시민의 삶도 보장되던 이곳에 계속 남을 것인지, 요즘 뉴스만 틀었다하면 나오는 소위 ‘핫’한 기관에서 폼나게 야근을 하고 격무에 시달릴것인지. 오랜만에 찾아온 커다란 선택의 갈림길에서 나는 평소답지 않게 하나하나 따져 묻기 시작했다. 둘 중에 내가 더 원하는 삶이 뭔지, 어떤게 나한테 더 좋은 선택일지. 평소같이 우물쭈물하며 동전이라도 던져볼까 하는 찰라, 질문을 한참 듣던 내 앞으로 갑자기 백발이 된 내가 나타났다. 그는 나를 향해 슬픈 눈을 하고 말했다. “그만 둬. 나 이렇게 산 게 너무 후회돼.”
공무원으로 살며 주 5회 하루 12시간 이상을, 5년은 성난 족제비눈깔, 2년은 맥없는 동태눈깔을 하고 살았다. 5년을 분노하다 2년은 체념을 했달까. 이곳은 시간도 공기도 흐르지 않는 방공호 같아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여행 온 기분마저 들었다. 하루에도 수십번 숨이 턱하고 막힐 정도로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일처리 방식이 고루했다. 쓸데없이 비장한 상명하복 문화, 부조리한 인사발령과 사무분장, 사람들 사이의 끝없는 뒷담화 등 내가 적응하지 못할 이유는 한두개가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또 한가지 가장 싫었던 건, 왜 해야하는 지도 모를 쓸데 없는 일을 공들여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윗사람 치적 쌓기를 위한 보여주기식 퍼포먼스를 하느라, 윗분에게 잘보일 실적 자료를 만드느라 행정력이 대거 낭비됐다. 여기서는 ‘가라’가 절반이었다. 가라 서명, 가라 교육, 가라 행사……. 공무원이 불성실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기관 단위로 주어지는 일이 너무 많았다. 가라가 아니면 일이 진행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대리 숙제, 대리 출석 이런 꾀부리기를 극도로 싫어했던 나에게 이곳은 매번 참아야만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내 눈이 사람의 것이 아니게 변해가는 동안 내가 퇴사라는 선택을 할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20대 백수가 파다한 심각한 구직난에 코로나19 팬데믹에다 글로벌 경제침체다 뭐다 세상은 혼란스러웠고, 공직이라는 담요는 포근했으며, 나는 실패에 길들여진 무기력한 노동자였다. 나는 이 꼴보기 싫은 철밥통을 꼭 끌어안은 채 따뜻한 이불 속에서 귤이나 까먹으며 평생을 구시렁대는 삶을 살아갈 거라고 굳게 믿었다. 나는 겁이 났고, 나 자신을 불신했다. 나도 잘 모르겠는 마당에 K-어르신들이 자신있게 제시한 정답에 아니요를 외칠 확신과 배짱도 없었다. 나는 직급 말고는 가진 것 없이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고, 어르신들은 (여자는) 공무원이 최고라 하셨다.
족제비에서 동태가 되는 변태는 이 조직 안에서 차츰 안정을 찾아가며 일어났다. 조직에서 일어나는 각종 불합리한 일에 대해서도 나는 점점 더, 불공평한 가사노동에 적응한 엄마처럼 모른 척 넘겨내기가 수월해졌다. 불안정한 고용시장에서 구직에 실패한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안도감을 느꼈고, 2-3년에 한번씩 이직을 한답시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는 이 삶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는 대단히 화가 나지도 우울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이 의미없이 반복되는 삶 위에서 ‘앞으로 더 살아야할 이유가 있나?’ 하는 의문에 자주 시달렸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올라오는 적막한 골목길 위에서도, 끝이 보이지 않는 서부간선도로 터널 안 깜깜한 운전대 앞에서도, 그 질문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서 있는 자리에서 지평선 안쪽으로 삶의 끝자락이 훤히 보이는 고도 낮은 인생을 살고 있었으니 어느 날은 아주 긴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여섯시 땡 하자마자 누구보다 빠르게 퇴근하는 날엔 똑같은 모텔방에서 계속해서 깨어나는 영화 <메멘토>의 한 장면이 떠올랐고, 똑같은 서류를 몇년째 붙들고 있던 날엔 모텔방에 갇혀 군만두만 계속 먹던 <올드보이> 오대수의 삶이 생각났다.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내 삶은 딱 모텔방 단 한 칸만큼만 다채로웠다. 그 단조로움이 내 삶을 지루하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가치관도 취향도 뚜렷한 내가 보통으로 뭉개진 단조로운 곳에서 갇혀있으려니, 나는 삶에서 자꾸만 지워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약해서 말하자면 군만두만 계속 먹던 오대수가 감금당한 방에서 풀려나 ‘티비 잘 나오는 따뜻한 방에 15년을 가둬줘서 고맙소.’ 할 리 없었으니, 따뜻한 방이란 것도 이 갇혀있는 삶을 미화할 정도의 힘은 갖지 못했다.
내가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은 때는, 전보 이틀 전에 인사발령이 나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강원도로, 이천으로, 서울로, 또 안성으로 여기저기 보내져 집에서 멀리 떨어진 수많은 저녁을 숙직실과 다름없는 조악하고 초라한 관사에서 우중충하게 보내던 때가 아니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땀을 뻘뻘 흘린 채 귀청하면 시원한 사무실에서 뉴스를 보던 팀장이 시큰둥하게 나를 맞이하던, 불공정한 업무분장이 나를 우롱하던 때도 아니었다. 그때는 끓는 냄비처럼 분노가 가득차서 펑 하고 터져 버릴 것 같다거나 들썩거리다 흘러나온 화가 부르르 온몸을 타고 내려오던 때가 아니었다. 내가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은 때는, 화가 다 가라앉고 싫은 소리 앞에서도 하하 웃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이 단단해진 때였다. 분노하고 저항하는 시기를 지나 나도 이제 어엿한 이곳 사람이 되었을 때, 당하기만 하던 약자에서 벗어나 어느정도 목소리가 생겼을 때, 그 평화 안에서 여전히 불행한 나를 보았을 때, 나는 이만 나를 구출시켜야겠다는 확신이 섰다.
그래 결심했어! 하던 순간에 우주는 두 길로 나누어졌다. 우주가 나뉘던 순간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실제로 머릿속에 번쩍하고 번개가 내리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다른 우주에서 나는 계속 공무원으로 살아갈테지만 이 우주에서 나는 좀더 나답게 사는 길을 걷게 되었다. 이것은 누구를 탓하지 않아도 되는 삶, 내가 결정한 삶이었다. 펼쳐질 미래는 몰라도 숨막히는 지루함에서는 해방된 삶이었다. 몇년 후 나는 너무 일이 잘 풀려 ‘그때 안 그만뒀으면 어쩔 뻔했어.’ 하며 가슴을 쓸어 내릴 수도 있고, 어쩌면 현실이라는 각목에 뚜들겨 맞고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때는 실컷 맞고 실컷 운 뒤에 다시 씩씩하게 일어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좋아도 싫어도 이 모든 건 누군가에게 눈 흘길 수 없는 온전한 내 선택이니까.
퇴직한지 거의 두달이 되어가는 요즘 나는 눈뜨는 게 설레기까지 하다.
모르긴 몰라도 이 정도면 일단 잘 살고있는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