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타인
링거 줄이 오른 팔목을 감고 걸쳐 있다
순순히 몸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
누군가 내밀한 나의 문을 밀고 들어선다
내일과 오늘이 다시 만날 수 없듯이
나는 나를 앓고 있다
미세 혈관을 타고 곳곳에 기억이 번진다
어떤 피는 서정이 되기도 했고
어떤 서사는 아직도 내 몸을 떠돌고 있다
이제껏 지탱해온 뼈처럼
스스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틈에 불현듯
누군가가 되어
출구도 없는 코마에서 흘러 다니고 있다
감상)
플로리안 헨켈 폰 도노스마르크 감독의 <타인의 삶>이란 영화를 통해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 의 전형적 인물이었던 아이히만과 주인공 비즐러의 차이를 보았다. 공무 집행을 하는 아이히만이나, 동독의 슈타지(비밀경찰)였던 비즐러의 삶은 그야말로 역할에 빈틈없이 충실하고 적합한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인생이 극과 극으로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은 ‘사유’의 힘이었다. 아이히만은 스스로 사유하는 힘이 없어 수많은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 재판정에 섰지만, 비즐러는 사유를 통해 겉으론 초라해 보이지만 내면이 충만한 존재로 돌아섰다.
하지만 나는 그 보다 사유를 끌어낸 것이 피감시자인 예술인 극작가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선한 영향력’이었던 점에 주목하고 싶다. 철두철미한 냉혈인이었던 비즐러가 매춘부와의 섹스에서 배설이 아닌 감정 섞인 스킨십을 애원하는 장면이나, 브레히트의 시 ‘마리 A의 추억’을 읽는 장면에선 사랑의 느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그의 절실함이 만져졌고, 존경하던 선생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작품 활동에 억압 받다 결국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드라이만이 연주한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를 들으며 눈물 흘리는 장면 등에선 이입된 분노와 슬픔이 느껴졌다.
감시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삶으로 인해 감동 받은 그는 신념이 확고했던 체제의 불합리와 관리자들의 부조리를 돌아보게 되며, 과거와는 다른 인간적인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그들을 돕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게 된 그가 얻은 것은 우편 봉투 개봉하는 말단 공무직과 드라이만에게 헌사 받은 책 한 권이 전부였지만, 그 책 한 권을 손에 쥔 비즐러의 마지막 장면은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베토벤의 ‘열정’에 대해 레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계속 듣는다면 혁명을 완수할 수 없을 거라고 했지.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 이 곡을 진심으로 듣는다면 나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 살아오면서 내 안으로 들어와 내가 된 타자성을 잊고 지냈다. 때론 그들이 좋아하던 한 곡의 음악이 나를 일으켜 세워주기도 했고, 한 권의 책이 세계에 대한 인식을 넓혀주기도 했다. 어떤 서정은 나로 하여금 시를 쓸 수 있는 자양분이 되어주기도 했고, 어떤 서사는 내가 살지 못한 경험의 지평을 넓혀 주기도 했다.
‘좋다, 나쁘다’의 이분법적인 사고나 ‘인간적’이란 개념조차 현대는 물론 모호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군가와 더불어 진심을 교감하고 나눔으로써 가질 수 있는 ‘선한 영향력’들을 상기하게 되고,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현대성이라고 일컫는 각박함 속에서 세계는 불안과 혐오 감정을 당연시하듯 껴안고 앓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사유할 수 있는 동기가 부여되고, 서로의 코나투스를 증진 시켜줄 수 있는 존재임을 돌아보게 한다.
차 한 잔 나눌 누군가를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