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사람

by 시선

지난 금요일이었다. 일을 하다 문득 창덕궁 후원이 생각났다. 지난가을 낙선재를 보러 창덕궁에 갔다가 후원을 보지 못하고 나온 탓이었다. 창덕궁 후원은 미리 예매하지 않으면 볼 수가 없었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휴대폰을 켜 창덕궁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그리고 후원 관람 예매 버튼을 눌렀다.

'토요일 오후 12시, 잔여 2명'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두 자리를 예매했다.


토요일 오전 11시, 운동화에 백팩을 메고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남자 친구를 만났다. 나는 입장권을 산 뒤 문 옆에 꽂혀있는 팸플릿을 하나 꺼내 들며 말했다.

"12시 관람이니까 한 시간 동안 둘러볼 수 있겠다."

"천천히 낙선재 쪽으로 가보자."

우리는 작은 다리인 금천교를 건너 인정전 쪽으로 향했다. 진선문이라는 커다란 문으로 들어가니 쭉 뻗은 돌 길이 나왔다. 남자 친구는 뒷짐을 지더니 내게 말했다.

"이게 어도라는 거야. 예전엔 왕만이 이 길로 걸을 수가 있었어."

"그나저나 여기 매점 없나? 목마르다."

평소 걸음도 느리고 천천히 보길 좋아하는 그는 뒷짐을 지고 궁의 이곳저곳 둘러보는 모습이 꼭 왕이나 선비 같았다. 그에 비해 궁에 들어서자마자 물을 찾으며 부산을 떠는 난 분주한 모습의 무수리 같았다.

인정전을 지나자 나무 몇 그루가 심어진 공터가 나왔다. 그리고 그 오른쪽으로 카페가 보였다. 나는 곧장 카페로 들어가 시원한 커피와 물을 주문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커피와 물을 들고 카페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없었다. 나는 문 옆에 있는 테라스에 앉아 아이스 카페 라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리고 갈증이 사라진 뒤에야 그를 찾기 시작했다.

그를 찾는 데엔 불과 얼마 걸리지 않았다. 맞은편 대각선 방향으로 세월아 네월아 걷고 있는 사람. 난 그를 보며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화가 온 줄도 모르고 걸었다. 난 전화를 다시 걸었다. 또 몰랐다. 서너 번을 걸어도 그는 끝까지 전화가 온 줄도 모르고 걸었다.

그는 희정당 쪽으로 걷고 있었다. 그리고 희정당 안으로 들어가 보더니 고개를 쭉 빼고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사진을 몇 번 찍고 난 뒤 그는 구경을 마쳤는지 뒤를 돌아 나를 찾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허공에다 팔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이리로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가 카페 앞으로 걸어 올 동안 아이스 카페 라떼를 다 마셨다. 나는 내 앞에 선 그에게 물을 건네고 지도를 펼쳤다. 팸플릿 안에서 고풍스러운 의자와 테이블이 놓인 사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여기 멋있네. 우리 여기 가보자."

"바보야 이게 희정당이잖아. 내가 방금 보고 온 거."

"아."

나는 혼자서 희정당에 갔다. 그리고 '임금이 집무를 보던 곳'이라는 설명을 후루룩 읽은 뒤 다시 그의 앞에 섰다.

"다 봤다. 다음 어디 갈까?"

"어디가긴 어딜 가. 관람 시간 다 됐어."

얼른 물만 사고 나와서 그를 따라 하나라도 더 볼걸 그랬다. 어쩌면 느린 그가 더 빠른 건지도 모르겠다. 문득 나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가 생각나 피식 웃고 말았다.


12시 정각에 맞춰 우리는 후원 입구에 섰다. 해설사에게 오분 남짓 창덕궁에 대한 역사를 듣고 언덕을 올랐다. 서울 한복판에서 새들에게 둘러싸여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14만 평쯤 되는 창덕궁 안에 후원이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놀랍다. 그렇지?"

"나 예약하길 너무 잘한 거 같아. 그렇지?"

내가 말이 너무 많았는지 그가 웃었고, 난 그제야 내가 '그렇지'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리막길이 나타나자 연못과 정자가 있는 부용지가 보였다. 날이 추워 연못은 얼어있었고, 그 위로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쌓여있었다. 해설사는 부용지 앞에서 서더니 이런 말을 했다.

"정조는 뛰어난 학문을 자랑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약주도 좋아하셨어요. 그리고 장난기도 심하셨다고 합니다. 이곳 부용각에서는 신하들과 시를 짓는 놀이를 자주 하셨다고 하는데요. 정해진 시간 안에 시를 짓지 못하는 신하들에겐 저기 보이는 연못 가운데 작은 섬으로 유배를 보내셨다고 해요."

나는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노는 왕과 신하들을 상상했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심성이 바르고 예의를 갖춘 교양인일 것만 같았다. 사실 내가 궁을 찾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궁에 오면 무언가 나도 차분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토요일 오전, 조용한 궁을 찾는다는 건 부산스럽고 요란한 내게 아이러니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고요한 궁을 좋아한다. 떠들썩한 내가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그 차분한 모습을 동경한다.

어쩌면 이런 나의 동경이 궁을 찾게하고 글을 쓰게 만드는 것 아닐까.


어느새 그는 저만치 떨어져 연못 주변을 걷고 있었다. 나도 그를 따라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보았다. 속이 요란을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