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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보언니 Dec 04. 2020

딸이 있어야 여행을 가지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난다는 우리 엄마의 말


5년 전 가을, 후쿠오카 유후인으로 엄마를 모시고 온천여행을 간 적이 있다. 후쿠오카 공항에 내려 유후인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야 했다. 유후인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곳에는 서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한국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엄마, 뭘 그렇게 봐? 우리 저 버스 타야 돼. 빨리 와. "

우리처럼 여행에 들뜬 사람들이 낑낑대며 버스에 캐리어를 싣고 있었다. 버스를 놓칠까 봐 마음이 급해 죽겠는데 엄마는 여유롭게 자꾸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래서 딸을 낳아야 돼. 그래야 나처럼 여행을 오지. 저기 좀 봐. 딸들이 다 엄마 모시고 여행 왔잖아. 아들들은 없고."

정말 그랬다. 몇 명의 젊은 커플들을 제외하고는 다 모녀가 함께 여행을 온 것이다. 유후인으로 가는 버스에서 아까 엄마가 했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이래서 딸을 낳아야 돼.. 그래야 여행을 오지. 이 말이 왜 그렇게 뭉클하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유후인 료칸에 체크인을 하면 저녁, 그리고 다음날 아침을 제공해준다. 엄마와 나는 아침에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아무 생각도 안 들고 평화로웠다.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깊은 산속에 자리 잡은 조용한 온천이어서 그랬을까, 엄마랑 같이 있어서 그랬을까. 이 세상에 엄마와 나, 둘만 있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행복해도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엄마랑 같이 누워있는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 돈 많이 벌어서 나중에 여기 또 와서 한 달 동안 엄마랑 있어야지.'


아침을 먹고 와서 방에 딸린 작은 노천탕에서 온천을 즐기기로 했다.
"엄마 먼저 온천 들어갔다와. 엄마 나오면 나 들어갈게."

"아유 정말. 넌 누굴 닮아서 그렇게 까다롭니? 내 뱃속에서 나왔으면서. 같이 좀 들어가면 뭐가 어때서."

어릴 때는 엄마랑 목욕탕도 같이 다녔는데 다 커서는 엄마한테 뭐가 부끄러운지 자꾸만 내 몸을 숨기고 싶었다. 엄마랑 같이 온천을 하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도 몰랐던 철없는 나였다.


이튿날 저녁, 엄마와 나는 오붓하게 오마카세를 즐기고 있었다. 엄마와 평소에 못 나눴던 대화도 나누고, 음식이 워낙 천천히 나오는 바람에 바깥 풍경도 보며 천천히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갑자기 창 밖에 우거진 나무를 보며 울먹이시는 것 아닌가. 밥 먹다 말고 눈물을 훔치는 엄마 모습에 너무 놀라서 물었다.
"엄마 갑자기 왜 그래?"
"엄마 너무 행복해서 너네 외할머니 생각이 나. 고마워 딸. 이렇게 좋은 곳에 데리고 와줘서. 나는 이런 곳에 엄마 한번 못 모시고 오고 보내드려서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나."
엄마가 할머니 얘기를 하는 바람에 나도 저녁을 먹다 말고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잊고 있었다. 엄마도 엄마가 있었다는 사실을.

여행을 가기 2년 전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우리 엄마는 할머니 생각이 얼마나 많이 날까. 외할머니가 어릴 때 키워주셔서 나한테는 엄마나 다름없었다. 나 역시 할머니를 보낸 상실감이 너무 커서 엄마를 위로해드리지 못했는데 2년이 지나고 온천 여행을 가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할머니를 여의었지만, 엄마는 엄마를 잃었다는 것을.




울다 코 끝이 빨개진 채 저녁을 드시는 엄마 얼굴을 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엄마 아들이 아닌, 엄마의 살가운 딸로 태어나서  감사하다고. 다음에도 여행 꼭 같이 오자고. 그게 어디든 엄마랑 가면 다 좋을 거니까.
하지만 다음은 없었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엄마의 암세포가 여기저기 퍼져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 엄마는 그렇게 6개월 만에 나를 두고 할머니 곁으로 가버렸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속으로 생각하지 말고 엄마한테 얘기해줄걸 그랬다. 지금이라도 이 말만은 꼭 전하고 싶다.


"엄마,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좋은 곳에 가면 엄마 생각부터 요. 엄마 딸로 사는 동안 한순간도 행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세상의 모든 엄마는 할머니가 되는 줄 알았어. 엄마는 할머니가 되고, 나는 엄마를 닮아 곱게 늙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내 욕심이었나봐. 그래도 하늘에서 할머니랑 지켜봐줘요. 엄마 딸이 여전히 예쁘게 잘 살고 있는 모습을요. 사랑해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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