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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보언니 Feb 14. 2021

나는 유독 설날에 서글프다

설날은 누구에게나 민족 대명절일까?




엄마가 돌아가셨다.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승무원이 되고 나서 명절을 본가에서 보내본 적이 없다. 남들이 쉬는 연휴에 승무원의 비행 스케줄은 더 바쁘기 마련이다.

명절 연휴에 운이 좋아 쉬게 되어도 나는 제주도 본가에 내려가지 않았다. 신입생 교육을 받을 때 제주도에 태풍이 와서 모든 비행기가 결항되어 출근을 못한 적이 있었다. 교육을 반나절이나 빼먹고 서울로 가는 비행기에서 나는 회사에서 잘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 일은 시간이 꽤 흐른 뒤에도 내게 트라우마로 남아, 웬만하면 본가에 내려가지 않게 되었다. 제주도는 워낙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곳이고, 비행기가 결항되면 육지로 돌아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https://unsplash.com/@daanstevens




언니도, 나도 취업을 하고 우리 가족이 설날에 한 자리에 모인 것은 거의 6년 만의 일이었다. 우리 가족은 여느 가족들처럼 오손도손 모여 앉아 전을 부치거나 떡국을 먹을 수 없었다.

우리는 제주도 본가 대신, 서울의 한 어두컴컴한 병원에 있었다. 병실에 있으면 병원 특유의 냄새와 답답한 공기에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이 울렁거렸다. 환기를 한답시고 창문을 열면 2월의 매서운 바람이 우리를 덮쳤다.


엄마를 1인실 병실에 모신 것은 우리가 해드릴 수 있는 마지막 효도였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엄마가 아니라 우리 가족을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몇 달 동안 6인 병실에서 다른 환자들과 같이 지내다 보니, 멀쩡한 나마저 마음이 병드는 것 같았다. 매일같이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진절머리가 났다. 스피커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코드블루, 코드블루'를 외치는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엄마가 나을 수 있다는 한줄기 희망을 가지고 살고 있는데, 옆 병실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환자들이 죽어나갔다. 의사와 간호사가 옆 병실로 몰려들고, 가족들은 어느새 유족이 되어 통곡했다. 나는 구경꾼이 되어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얼굴도 모르는 남의 죽음을 애도했다. 나는 한 치 앞도 모르는 보호자였다.


우리 가족은 함께 모여 병실에서 나름 오붓한 설을 보냈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 보낼 마지막 설날이라는 것을 알았다. 설 연휴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우리 곁을 영영 떠났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그나마 명절다운 명절이었다. 내 기억 속의 명절은, 온 가족이 모여 왁자지껄 시끄럽게 덕담도 주고받고 동그랑땡도 해 먹는 그런 날이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로 내 기억 속의 명절은 2016년에 멈춰있다. 특히나 설날은 더욱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설날 전후가 늘 엄마의 기일이었기 때문이다. 매년 1월이 되면, 올해는 설날이 언제인지 2월 달력을 먼저 들춰보곤 했다. 설날하고 엄마 기일이 멀수록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애석하게도 올해는, 설 연휴에 엄마 기일이 있었다. 엄마의 기일을 2주나 앞둔 2월 초부터 나는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코로나 19 때문에 비행이 없어 추석이고 설날이고 이제는 한국에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엄마가 내 옆에 없다.





대국 한 송이를 사들고 엄마를 보러 갔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여기에 있을까?"


우리는 엄마가 좋아하는 이미자 노래를 틀어놓고 엄마의 납골당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미자의 목소리에 아빠의 목소리가 묻혀 나는 다시 물었다.


"응? 뭐라고?"

"여기는 산 사람을 위한 곳이지. 산 사람들이 와서 위로받고 가는 거지."


사후세계를 믿지 않지만 엄마와 외할머니가 하늘나라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런 믿음이, 마음에 힘이 없어 자꾸만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나를 더 올곧고 씩씩하게 살게 했다.


납골당은 과히 산 사람을 위한 곳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영면한 그곳에 가서, 잘 있는지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는 곳. 설날이라 그런지 그곳에는 위로받고 가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우리 옆에서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가족을 보니 애도를 하러 온 것인지, 나들이를 하러 온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다들 화사한 꽃다발을 들고 와서, 납골당은 다채로운 빛깔의 꽃들로 가득 차있었다. 엄마를 보러 수도 없이 들락거렸던 그곳은 늘 쓸쓸한 기운이 감돌곤 했다. 곳곳에서 까마귀 소리가 들려 내 기분을 더 우울하게 만든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엄마가 있는 곳이 모네의 정원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엄마 보고 나서 우리 점심은 뭐 먹지?"


벌써 5년이나 지났다고, 나는 엄마 앞에서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엄마 사진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는데, 시간이 약인 것 같으면서도 참 야속하다 싶다.

엄마 앞에서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나를 보면 우리 엄마가 조금 섭섭할 것 같다. 우리 딸 아직도 맨날 밥걱정만 하며 사는구나 하고.


시간이 나를 치유해준 것이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소중한 체험이 있다면 그건 시간이 해결 못할 악운도 재앙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은 신(神)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中


이 글을 쓰며 내년 설날 날짜를 확인해보니 2월 초순이다. 참 다행이다, 2월 중순이 아니라서.

시간이 신이라고 하니, 내년은 올해보다는 마음이 덜 힘들 것 같다. 정말로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신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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