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전쟁터

미스터리 판타지 소설 ≪유령이 미는 도시≫

by 시선우


[1] 하얀 전쟁터


위스콘신 동부의 소도시, ‘폰드 두 락’을 중심으로 또 한 차례 이상 현상이 지나가고, 재니스 리는 약속 장소에 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약속 장소라고 하기엔 가벼운 어감이 있다. 중대한 목적지 정도가 어울리겠다. 그녀는 옅은 색의 립스틱을 바르고, 10월의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는 스카프를 목에 둘렀다.


“문제가 없길 바라며.”


그리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치르는 자신만의 작은 의식(현관문 앞에 장식된 도자기로 만들어진 거북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일)을 마치고 집을 나섰다.




이상 현상 대책 위원회의 본부는 공명이 울리는 새하얀 곳이었다. 재니스와 마주 보는 곳에 멀찍이 앉아 있는 세 명의 위원장 뒤로 ‘9번째 원인 규명 및 대책 회의’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8까지는 어떻게 버텼던 건지, 9가 쓰인 새로운 천 뒤로 숫자를 고친 자국이 비쳤다. 재니스는 심호흡하고 자리에 앉았다.


약 5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 작은 도시에 이상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6개월 전인 4월부터였다. 누구도 이 현상이 지속적으로 발생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기에 대책 위원회가 생긴 것도 그로부터 3개월 후였다. 하지만 어떤 전조도 없이 순식간에 구조물이 주저앉아 버리는 이상 현상의 원인은 아직도 밝히지 못한 상태였다.


재니스는 발언하기 위해 ‘5번째 원인 규명 및 대책 회의’부터 신청했는데, 이후 네 번을 더 신청하고 나서야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녀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자신과 다른 한 사람만이 알고 있는 이 끔찍한 현상의 원인에 대해 내뱉었다.


그녀의 말에 본부 내부가 공명 하나 없이 조용해졌다. 재니스는 자신을 향한 그들의 모습이 서로를 반사해 착시를 일으킨 거울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적막을 깬 건 재니스의 양옆으로 쭉 늘어앉은 위원회 회원 중 좌측에 앉은 남자였다. 그는 큰 몸집에 청록색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눈살을 찌푸리더니 셔츠 앞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유령인지 뭐시긴지가 건물 외벽을 밀어서 8층짜리 건물이 순식간에 박살 났다, 그런 거죠?”


“네, 맞습니다.”


재니스가 대답하자, 남자가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며 웃었다.


“맨손으로 건물을 밀어 부술 수 있다니, 유령들이 다들 삼손이라도 되는가 봅니다.”


남자의 비아냥에 장내가 한바탕 웃음으로 술렁였다. 재니스 역시 그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머릿속엔 그날 본 광경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타는 노을을 등지고 벽을 밀던 아지랑이 같은 실루엣들. 완전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히 보였던 모습. 그녀가 사진으로도 찍히지 않았던 그 모습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남자가 위원장들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위원장님, 영양가 없는 얘기를 더 들을 필요가 있습니까? 오늘 발언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사람만 여덟 명입니다. 이것도 제보자 수백 중 추리고 추린 거지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남자의 옆에 앉아 있는 머리가 벗겨진 다른 남자가 말했다. 그는 들고 있는 태블릿 화면을 몇 번 옆으로 넘겼다.


“이상 현상이 발생할 때마다 도시를 벗어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점점 심해지는 피해 규모에 이젠 집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가는 사람들도 수두룩합니다. 카운티는 물론 위스콘신주에도 영향을 주고 있지만, 그중 이상 현상이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폰드 두 락 시만 보면, 지난주까지 약 1만 명, 4,358가구가 이 도시를 떠났습니다. 이는 인구 대비 약 22%의 감소율입니다.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이 도시는 분명 유령 도시가 될 겁니다.”


“아까 누가 유령 얘기를 하던데, 이미 유령 도시가 된 거 아닙니까?”


하하하. 청록색 셔츠 차림의 남자였다. 그때 가장 중앙에 앉은 위원장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장난은 그만둡시다. 여분의 시간을 제외하고 한 사람에게 할당된 시간은 20분이니, 그만큼은 들어보도록 하지요.”


위원장의 말에 재니스는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까부터 비아냥대는 남자를 쏘아보았다.


“믿기 힘든 얘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섯 번의 신청 끝에 이곳까지 와서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저 역시 이 도시에 산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이곳을 떠나고 싶지도 않고, 하루빨리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어디선가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발언자 나이를 고려하면 토박이는 아니네요. 재니스는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여태 원인을 규명하지 못했으니, 여러 가능성을 고려해 주셔야 합니다. 저 역시 제가 본 것을 명확하게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진에도 찍히지 않거든요. 그래서 더 자세한 조사를 요청하기 위해 이곳에 나온 겁니다. 무너진 건물 외벽을 미는 형체들을 보았다는 한 가지 확실한 경험을 가지고요.”


그녀는 전방 위원장 셋, 좌측 회원 아홉, 우측 회원 아홉을 둘러보며 몇 번이나 연습했던 말을 내뱉었다. 그때 우측에 앉은 여자가 할 말이 있는 듯 펜을 들어 올렸다. 여자의 주변에는 유난히 많은 전자기기와 자료들이 쌓여있었다.


“재니스 리 씨, 소중한 제보는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건 미는 힘이라고 보기 어려워요. 무너진 건물 주변에 있던 CCTV 영상을 확인해 보면, 건물이 옆으로 움직이거나 일부가 파손된 후에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순식간에 주저앉아 버리니까요.”


여자는 눈썹과 입꼬리를 들어 올려 아주 무감각한 웃음을 지었다.


“아직 정확한 원인 파악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만, 일단은 이 도시와 그 주변으로 일어나고 있는 문제다 보니, 전면 하수도 공사로 인해 지반이 약해진 상황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싱크홀 같은 문제인 거죠.”


여자의 확고한 말투에 재니스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보기에 그들은 그럴듯한 원인을 정해놓고, 거기에 부합하는 제보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 하수도 공사 부작용과 관련한 제보를 기다리고 있나 보군요. 제가 하는 말은 들리지도 않겠고요.”


쌓여가는 회의 횟수로 기네스북에 오르려는 듯, 몇 번이고 플래카드의 숫자만 고쳐가며.


그때 위원회 회원 중 한 사람이 느릿하게 팔을 들어 올렸다. 눈썹이 축 처진 백발의 노인 헨리 로저스였다.


“나는 리 씨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오.”


노인은 낡은 항공 점퍼 안에 ‘로저스 농장’ 글자가 하얗게 인쇄된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로저스 농장이라면, 도시 중심부에서 차로 서쪽 15분 거리에 위치한 낙농장이었다.


“지금 사람들이 이 동네를 뭐라고 하는지 아시오? 귀신이 들렸다고 하고 있소. 다들 우리 농장의 간판을 알 거요. 23번 고속도로와 Y 카운티 도로가 만나는 곳에 세워진 커다란 홍보용 간판 말이오. 그, 재작년에 폐렴으로 먼저 간 조쉬가 우유 잔을 들고 있고, 뒤로는 젖소 서너 마리가 돌아다니는 간판인데…”


노인이 주변을 둘러보고 간판에 대해 더 설명하려고 하자, 청록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끼어들었다.


“예, 다들 잘 알고 있습니다. 로저스 씨.”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열한 살에 이사 온 뒤로 20년 동안 위스콘신에 살아온 재니스 역시 그 간판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건 3년 전 여행을 위해 잠시 도시를 벗어났을 때였다. 게다가 재니스는 그 농장에서 생산된 ‘로저스 스타 우유’를 먹고 자랐다.


“원래 간판에는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진 도시’라고 쓰여 있었소.”


헨리의 말에 재니스는 하얀 바탕에 파랗게 쓰인 문구가 기억났다. 그 아래에 있던 ‘당일 우유 짜기 체험! 위스콘신의 여유를 즐기세요.’까지도.


“그런데 얼마 전 뉴스를 보는 중에 무슨 드라큘라 특집 다큐멘터리 오프닝처럼 그곳을 비추는데… 누군가 빨간색 스프레이를 잔뜩 뿌려놨더군.”


책상 위에 있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 동생 조쉬와 젖소들에게 빨간 눈과 악마 뿔을 그려놓고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진 도시’ 위에 ‘귀신 들린 도시’라고 써놨지. 그래, 귀신! 다른 사람들 눈에도 뭔가 이상한 거요. 제대로 된 원인도 찾지 못하고 귀신이 곡할 노릇만 일어나고 있으니.”


그때 세 위원장 중 왼쪽에 앉은 위원장이 ‘아버지, 진정하세요.’라고 말하며 옆에 있는 헨리의 떨리는 손을 슬쩍 잡아 내렸다. 노인은 위원장의 손을 가볍게 무르고 말했다.


“귀신이라도 좋으니, 이렇게 앉아만 있지 말고 뭐라도 잡아내서 일을 진행해야 하는 거 아니오?”


“어르신, 불미스러운 일을 겪으셔서 힘드신 건 알지만, 그렇다고 귀신은….”


자료에 둘러싸인 여자가 노인의 매서운 눈초리에 말꼬리를 흐렸다. 노인 헨리 로저스가 재니스를 돌아보았다.


“리 씨, 오해할까 봐 말하지만 나는 단순히 그 간판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네. 우리 농장은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었소. 농장의 크기, 가축 수, 생산량과 판매량 모든 게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었지. 그런데 어느 날, 농장에 있는 기념품 가게가 순식간에 무너진 거요. 기념품 가게는 통나무로 지었는데, 하필 농장 쪽으로 튕겨 나간 통나무 잔해에 젖소 여러 마리가 희생당했소.”


재니스 역시 최근에 일어난 그 사건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붕괴의 원인을 파악하기 어려워, 역시 이상 현상이 원인으로 지목된 사건이었다. 재니스는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헨리의 말을 끊을 이유가 없어,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더 재수가 없던 건 그 맘쯤 이상 현상을 취재하러 온 기자가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정신없이 치우고 있는 새에 죽은 소들과 피 묻은 바닥, 기념품 가게에서 판매하던 ‘로저스 농장’ 캡 모자가 흙먼지에 나뒹구는 모습을 찍어갔다는 거요.”


헨리가 옆에 있는 물을 단번에 들이켜더니 쾅 내려놓았다.


“이것도 다 그 귀신 나부랭이 때문이겠지. 그 모습이 보도된 이후로 고작 몇 주 만에 우유 판매량의 사분의 일이 줄어들었고, 우유 짜기 체험 안내문도 걷어놓은 지 오래요. 사람들이 그러더군. 우리 농장도 저주를 받았다고. 농장을 보면 참담한데, 그곳을 외면할 수도, 떠날 수도 없소. 그러니 리 씨, 나는 당신 말이 없는 얘기라고 생각하지 않네. 오히려 당신 말이 맞았으면 좋겠어. 무슨 해결이라도 할 수 있도록!”


그때 다시 머리 벗겨진 남자가 말했다.


“로저스 씨, 리 씨의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증명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여태 원인을 못 찾았던 이유 역시 어떤 제보도 참에 가까운 증명이 안 되었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일리 있는 말이라도 증거가 없으면 일리가 없는 것과 같아요.”


그의 말에 대부분의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 로저스만이 증명을 기다리듯 재니스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현재로써는 증명이 어려워요. 사진에도 나오지도 않고, 어디에 출몰할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죠. 제 눈에는 흐릿한 실루엣을 가진 투명 인간처럼 보여요. 그렇지만, 한 사람 눈에는 제대로 보이는데… 제 오랜 친구 커스틴 홀입니다. 커스틴은 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재니스는 다른 사람이 이의를 제기하기 전에 신속하게 다음 말을 내뱉었다.


“저도 처음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으나,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가만히 봤더니 그들의 실루엣을 볼 수 있었던 겁니다. 만약,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우리가 본다면… 어쩌면 증명이 될 수도 있겠어요.”


“지금 그녀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당장은 병원에 입원해 있어 이곳에 오기 어려운 상황입니다만, 도와주시면…”


“잠깐만요.”


청록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재니스의 말을 막았다.


“병원이라고요?”


그가 재니스를 지긋이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병원이지요?”


하필. 재니스는 고민했지만, 진실을 말하는데 주춤할 필요는 없었다.


“레이크 정신 병원입니다. 하지만 이건 그녀의 얘기가 거짓이라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녀가 평소 우울증을 앓고 있어서 잠시 입원한 것뿐이에요.”


청록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이겼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위원장을 향해 팔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내보였다. 헨리 로저스도 고개를 떨구었다. 젠장! 재니스는 예상하던 여러 결말 중 최악이 걸렸음을 직감했다.

중앙에 앉아 있는 위원장이 말했다.


“20분이 다 되었습니다. 해당 제보에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시면 됩니다.”


재니스를 제외한 스물한 명 중 손을 든 건 단 두 명이었다. 위원장은 펜을 들고 앞에 놓인 종이에 무언가 휘갈겨 썼다. 기각, 보류, 거절 같은 말일 것이었다.


“과반수를 넘지 못하였으므로, 재니스 리 씨의 안건은 보류하는 것으로 결정하겠습니다.”



(계속)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