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 리뷰
문학을 읽을 때면 또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쉽사리 잠들지 못했던 어느 새벽에 책을 펼쳤던 적 있었다. 한참을 읽다가 문득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이 소설의 서두와 흡사한 분위기였다. 중년의 주인공 와타나베가 착륙 즈음에 비틀스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이 흘러나오자 옛 시절이 떠올라 격한 감정에 빠져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장면 말이다. 이는 필자가 문학의 바다로 뛰어들기 시작했을 무렵의 일이었다.
“나는 더듬더듬 말했다. 말을 이어 가는 중에도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말했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방식이다.” 이장욱의 『천국보다 낯선』에 등장하는 정鄭은 말했다. 언젠가 이런 사람을 만난다면 어떻게 행동할 수 있을지, 그가 말을 마칠 때까지 초조함 없이 기다릴 수 있을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지 등 다양한 상황을 상상하면서 읽었다. 어디서 본 적 있는 듯한 인물, 미워했던 사람과 닮은 인물, 나와 아주 비슷한 인물의 의식을 들여다보며 성찰해 나갔다. 그것은 필자가 사람 이해하고 배워가는 방식이었다.
일이 풀리지 않거나 위안을 얻고 싶을 때도 책을 펼쳤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라는 오르한 파묵의 소설 『새로운 인생』 속 첫 문장처럼. 삶을 뒤흔드는 마법 같은 자극과 영감, 그리고 명쾌한 답을 기대하며 펼치기 일쑤였다. 그 기대는 으레 무너졌지만 말이다. 바꿔 말하면 한때는 문학으로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재형이 아닌 과거형으로 말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문학을 통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적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었다. 삶의 무게를 덜어주는 유효한 처방도 마음을 뒤흔드는 새로운 자극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다. 문학의 세계에 발을 들인 이상 멀어질 수는 없을 거라고. 작은 책은 언제나 우리의 우주보다 넓고 거대하다고. 18세기 영국 평론가 새뮤얼 존슨의 말처럼 책은 각자 존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지는 않지만, 각자의 존재를 견디게끔 해준다. 적어도 덜 외롭게 만들고 삶을 살아볼 만한 것으로 만든다는 건 실로 엄청나지 않은가. 이와 같은 읽는 '즐거움'을 아는 독자 혹은 이제 막 그런 독자의 길로 들어선 당신에게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를 소개하고 싶다. 망망대해 같은 세계문학 읽기의 충실한 안내자가 될 것이다.
“나는 문학이 인간의 외로움을 달래길 바라지만, 그 무엇도 인간의 외로움을 달랠 수 없다. 문학은 이 사실에 대해서 거짓말하지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문학은 필요하다.” 그런 문학이 없다면 우리는 더 외로울 것이다.
- 이현우,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 고유서가, 2020, 19쪽.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는 ‘이현우’라는 본명보다 인터넷 서평가 ‘로쟈’로 더 알려진 저자의 세계문학 서평집이다. 466쪽에 달하는 많은 분량의 책을 간신히 읽고 나면 궁금해진다. 이 많은 책을 언제 다 읽은 건지, 어떻게 하면 박학하게 문학을 읽어낼 수 있는지 묻고 싶어진다. 힌트는 책머리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책은 2012년부터 2020년 2월까지 8년간 쓴 칼럼과 해설을 선별하여 묶은 서평집으로 비록 문학에 국한된 글이라 하더라도 무려 99편의 소설을 다루고 있다. 이처럼 방대한 독서 경로를 들여다보면 자연스럽게 따라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한편 필자의 삶에서도 문학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던 때가 있었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문학으로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고, 문학으로 삶을 이해하고 배울 만큼 열정이 있었다. 그리하여 복수전공으로 국어국문학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예전만큼 문학에 큰 흥미를 갖지 못하고 있다. 문학의 세계에 발을 들인 이상 멀어지지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읽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환상이 깨진 탓일까. 책을 옆에 끼고 다니고, 필사해보기도 하고, 독서 모임을 진행하기도 했지만 어쩐지 읽으면 읽을수록 얽히고설킨 미로를 헤매는 것 같았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언어는 우리를 서로 이어주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 그러나 완전히 이어주진 못한다는" 환상이 깨진 뒤로 손이 가지 않았다. 어떤 매체보다도 언어가 구체적이고 완전하기 때문에 삶의 많은 부분을 해결해줄 거라는 순진한 믿음이 있었다.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을 채워준다거나 삶의 태도가 한순간에 달라진다는 믿음 말이다.
오히려 철부지의 꿈이 깨진 뒤로는 기대 없이 접근했다. 그 대신에 저자의 시선을 쫓았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무엇에 초점을 맞춰서 살아가는지를 엿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얻는 배움이 필자를 덜 외롭게 만들고, 삶을 살아볼 만한 것으로 만들었다. 다르게 말하면 존재를 견디게 했다. 삶을 뒤흔들 만한 거창한 기대와는 달랐으나 다른 기쁨을 얻은 것이다. 문학이 아니라면 존재를 견딜 수 있는 지구력조차 기르지 못했으리라. 이제서야 삶에 빠져 죽지 않을 힘이 생겼다.
“소설 쓰기란 세상 또는 삶에 우리가 찾을 수 없는 어떤 중심부를 설정하고, 그것을 풍경 속에 숨두는 것입니다. 소설 읽기는 같은 작업을 반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소설 읽기란 세상에 중심부가 있다는 것을 믿는 노력입니다.” 파묵이 보기에 위대한 걸작은 모두 “세상에 중심부와 의미가 있다는 희망과 생생한 환상”을 준다. 소설 읽기의 행복감은 그런 인상에서 비롯된다.
- 이현우,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 고유서가, 2020, 25쪽.
책을 덮고 나서 소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특히 '문학을 왜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세계 여러 작가들의 시선이 필자에게 남았다. "좋은 소설은 이미 알고 있는 앎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되묻게 한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는 사례다."(114쪽)라는 말처럼 좋은 작품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질문하게끔 만든다. 어쩌면 모든 문제를 더 복잡하게 생각하도록 이끄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 덕분에 세상이 덜 나빠지고, 우리는 한 뼘 더 인간다워질 수 있다. 창조된 세계 속 인물의 모습에서 독자가 자신의 모습을 보거나 삶을 성찰하기도 한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에서 그는 여행의 목적을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고 '본연의 나 자신'을 깨닫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소설을 읽는 목적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망망대해에 빠져 죽지 않고 유영하기 위한 힘찬 발길질의 시작일지도.
문학은 좀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한순간에 무언가를 바꾼다고 기대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문학 덕분에 세상이 덜 나빠질 수는 있다. 문학은 인간의 영혼을 한데 모을 수 있다. 그것이 선이건 악이건 간에.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란 질문에 답하자면 이렇다. 성경도 인간을 바꾸지 못하는데, 어떤 문학이 인간을 바꿀 수 있겠는가.
- 이현우,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 고유서가, 2020, 3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