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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수집가 Apr 04. 2020

불완전한 우리의 흑역사

톰 필립스, 『인간의 흑역사』


처음으로 실패했던 경험은 무엇이었을까?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분명히 대수롭지 않은 사건일 게 뻔하다. 떼어내던 스티커에 손을 베였거나, 뛰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다거나, 그래서 엄마를 쫓아다니면서 엉엉 울었던 경험 정도이지 않을까. 아주 사소해서 기억해내려고 애쓸 필요도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이처럼 태어나서 누구나 한 번쯤 크고 작은 실수를 저지르고, 실패를 겪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신을 자책할 필요는 없다. 앞서 그랬듯이 어릴 적 실패담을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봐도 생각나지 않았던 건 물론이고, 당장 어제의 일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망각이라는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도 있다. 필자가 저질러온 일들은 실패담 축에도 끼지 못할 만큼 어처구니없는 일들 말이다.

  

그것은 바로 진시황, 히틀러, 마오쩌둥, 콜롬버스 등 우리가 아는 헛짓거리의 대명사들부터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개개인의 치명적인 흑역사까지 총망라하고 있는 『인간의 흑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책을 쭉 읽고 나면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인간, 뭐 별거 없네.”



바보짓의 서막과 미래


『인간의 흑역사』는 현생 인류의 탄생부터 현재까지 인간이 저질러온 대실패의 기록을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지점은 누구나 알 법한 사건이 아닌 역사책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들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320만 년 전, 나무 위에서 어이없게 횡사한 유인원 루시 사건을 시작으로 화장실 밸브를 착각한 바람에 침몰한 독일 잠수함 U-1206, 스코틀랜드 제국을 일으키려다 국부의 절반을 허공에 날린 패터슨 이야기까지 각양각색의 흑역사가 쏟아져 나온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경고한다. 남의 불행을 고소해하는 취미가 없으신 분은 이쯤에서 책을 덮기를 권한다고. 사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살짝 망설였다. “타인의 실패를 함부로 고소해한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라면서 속으로 저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후 누구보다도 큰 소리로 웃고, 그들을 고소해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고서 알게 되었다. 이 유쾌함에 취향 저격을 당했다는 걸. 인간의 화려한 바보짓의 역사가 이토록 재밌게 느껴지는 건 바로 시니컬하고 유머러스한 필치 덕분이라는 걸 말이다.


괄호 속 저자의 생각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유의 신랄한 어조에 익숙해질 즈음, 인간이 끊임없이 바보짓을 거듭하는 이유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저자는 이를 뇌의 인지적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대규모로 죽을 쑤는 원인은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만의 특성 때문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즉, 인간은 세상에서 패턴을 읽어내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알아낸 것을 다른 인간에게 전할 수 있다. 또한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할 줄 안다. 하지만 문제는 그중 어느 하나도 그리 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 머리는 교향곡을 작곡하고 도시를 계획하고 상대성이론을 생각해내지만, 가게에서 포테이토칩 하나를 살 때도 무슨 종류를 살지 족히 5분은 고민해야 겨우 결정할 수 있다. 

- 톰 필립스,『인간의 흑역사』, 윌북, 2019 , 20쪽


패턴이 없는 곳에서도 패턴을 읽기 때문에 이로 인한 인지의 오류, 착각, 편향 등 수없이 많은 착오를 겪는다. 특히 뇌는 무작위 속에서 패턴을 창조하는데, 이와 같은 뇌가 사용하는 편법을 ‘기준점 휴리스틱’과 ‘가용성 휴리스틱’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기준점 휴리스틱이란 뭔가를 결정할 때, 특히 사전 정보가 부족할수록 제일 처음 얻은 정보에 따라 결정이 크게 좌우되는 현상을 말한다. 그리고 가용성 휴리스틱의 경우 모든 정보를 신중히 따지기보다는 무엇이든 제일 쉽게 떠오르는 정보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인간은 교향곡을 만들고, 달에 사람을 보내고, 블랙홀을 생각해내는 등 위대한 업적을 남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슈퍼에서 과자 하나를 살 때도 5분은 족히 고민해야 하는 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라고 한다. 아울러 앞서 언급했던 휴리스틱뿐 아니라 다양한 인지 편향 현상을 소개하고, 이 모든 인지적 오류가 층층이 쌓여 발생하는 사건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를 예술, 문화, 과학, 기술, 외교 등 총 10개의 주제로 정리한 다방면의 역사적 사건과 더불어 전문적인 자료가 뒷받침되어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콜롬버스가 단위를 틀려 지구 크기를 아예 잘못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나, 칭기즈칸의 편지를 잘못 읽어 지도에서 영영 사라지고 만 호라즘 제국 이야기가 그 예이다.



너와 나, 우리의 이야기


세상을 이해하려다 편법을 쓰는 바람에 온갖 어이없는 판단을 내리게 되고, 심심하면 주변 환경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자연을 통제하려는 어설픈 시도를 하는 등 일을 말아먹는 일련의 재주를 살펴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인간이란 참 어리석고 불완전한 존재구나”라고. 그리고 인간의 실수와 실패가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역사란 멀리 떨어진, 혹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라는 점을 수긍하게 된다.   


어쩌다 이 꼴이 됐는지 한탄하는 독자에게, 저자는 위안이 되고자 이렇게 말한다. “걱정 마시라, 인간 세상은 항상 그 꼴이었다. 그리고 우린 아직 살아있지 않은가?” 이는 좁쌀만큼의 위안이 아닌, 큰 위로로 다가온다. 당신과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진짜 큰 바보짓을 저질러본 모든 사람이 이 책을 읽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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