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윤희에게>
20세기 초반까지의 영화들은 동성애에 관한 편견을 넘어서지 못했다. 동성애를 재현하는 이미지와 구현의 방식은 전형적 유형이라는 한계로 드러났다. 가령 웃음 유발의 장치로 사용된 ‘계집애 같은 사내(sissy man)’, 성애적 장치로 전시되는 ‘남자 같은 레즈비언(mannish lesbian)’, 그리고 비도덕과 퇴폐를 상징하는 타락한 동성애자의 이미지가 그 예이다.[1] 이러한 관례는 부정적 재현이라는 틀에 갇혀서 영화의 보편적인 플롯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젠더 이분법의 구조에 포함될 수 없는 동성애자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종종 역겹거나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영화에 남아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투적 형상화는 이성애 우월적 신화에 은밀히 의지하고 이성애적 규범에 근거하여 재구성된다.[2]
페미니즘 영화 비평가인 로라 멀비(Laura Mulvey)는 이러한 현상을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 (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ema)’에서 비판한 바 있다. 중립적으로 보이는 고전 내러티브 할리우드 영화는 실제로 가부장적 무의식에 연루된 성차별적 구조를 띠고 있다. 이에 따라 영화는 여성 스타를 남성 ‘응시(gaze)’의 대상으로, 가부장 사회 속 ‘이미지로서의 여성’으로, 매혹적이고 아름답고 전시되며 성적 특성으로 결합된 대상으로 타자화했다. 그리하여 ‘스펙터클’로 자리매김한 여성은 서사의 진행을 크게 방해하지 않는 부차적인 대역으로만 등장하게 되었다.[3] 그 결과로 영화에서 발생하는 능동적인 성애적 쾌락과 시선은 철저히 남성의 소유물이 되었고, 그곳에 여성을 위한 온전한 자리는 하나도 없었다. 성차별적으로 구조화된 영화의 속성은 ‘젠더’ 문제를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페미니즘 계열의 영화만이 남성 중심의 서사와 응시에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그들이 설 수 있는 온전한 자리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자리를 아름답게 빛내는데 기여하는 영화 <윤희에게>는 한 줄기 희망처럼 느껴졌다. 많은 관객으로부터 지지받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영화가 세상에 진즉 나왔어야 했다는 관객의 갈증과 맞닿았다. 특히 ‘한국 중년 여성의 퀴어 서사’라는 여태껏 아무도 다루지 않았던 소재를 왜곡 없이 담아냈다. 다시 말해 “성차별주의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변형시키거나 “개인적 차원의 해결로 제시”하거나 성적 대상화를 하고 과한 이목을 통해 차별하는 단계에 머물지 않았다.[4] 한 단계 더 나아가 한 여성으로서의 현실을 포함하고 있다. 어떠한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사랑의 상실과 회복에 관해 말하는 동시에 퀴어 여성들의 온전한 목소리를 담아낸 <윤희에게>. 이 영화 속의 메타포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건조하게 살아가는 윤희. 일터로 향하는 차 안에서 창 밖을 바라볼 때, 삶의 이력이 설명되는 듯한 깊은 눈빛은 어딘가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그런 윤희에게 딸 새봄은 이렇게 말한다. “엄마랑 아빠랑 이혼할 때 내가 왜 엄마랑 산다고 한 줄 알아? 엄마가 아빠보다 더 외로워 보여서.” 공장 조리사로 일하는 윤희는 남편과 이혼한 뒤 딸 새봄과 함께 살고 있다. 가끔 술을 마시고 찾아오는 전남편의 방문 말고는 특별한 일 없이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에서 온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편지는 첫사랑이 보낸 러브레터였다. “윤희에게.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 너는 나를 잊었을 수도 있겠지. 벌써 20년이나 지났으니까. 갑자기 너한테 내 소식을 전하고 싶었나봐.” 이 편지를 꺼내 본 새봄은 쥰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리고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엄마로써의 윤희가 아닌, 한 사람으로써의 윤희가 지나온 삶에 대하여.
한국 사회는 이성애 중심의 틀에 맞추어 타인의 정체성을 파악한다. 특히 결혼한 여성은 항상 이성애자로 간주되며, 비이성애자가 존재하더라도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부계 중심의 가족질서에서 "여성인 자신의 자아가 없는 상태"로 개인성을 부정당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윤희 역시 10대 시절 성적 지향을 이유만으로 정신병원에 다녀야 했고, ‘정상적인’ 이성애자 여성의 생애주기에 따라야 한다는 보수적인 가족 관념에 의해 결혼했다. 편지를 받기 전까지 윤희는 '나'라는 정체성 보다 '엄마'의 정체성이 우선시되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한국인임을 숨기고 살아왔던 쥰은 일본과 한국 그 어디에서도 완전한 소속감을 느낄 수 없는 소수자의 슬픔을 보여준다. 이에 관해 임대형 감독은 한국과 일본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를 “두 국가가 공통적으로 배타적 민족주의 국가, 소수자 혐오, 차별의 일상화, 남성 중심적인 시스템이 오랫동안 이어진 국가이기 때문”[5]이라고 말했다.
억압된 두 인물이 순식간에 삶의 새로운 국면을 나아가는 순간들이 영화에 담겨있다. 그 영화적 장치를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는 기차 신이다. 윤희가 편지를 발견한 다음 날 공장에 출근하지 않고 하염없이 철로만 걸었다. 편지 속 쥰의 말처럼 “살아가면서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온 것일까. 관객은 카메라를 등진 채 걸어가는 윤희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것처럼 느껴졌던, 원치 않는 삶을 살아야만 했던 지난 날의 무게가 어깨를 더욱 무겁게 짓누르는 듯하다.
이때 윤희 옆으로 바짝 붙어서 지나가는 기차를 주목하게 된다. 화면의 구도 상 기차는 사선 방향으로 앞질러 나간다. 극적인 행동이 없는 조용한 맥락의 흐름 속, 팽팽한 사선으로 앞질러가는 기차는 유독 역동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마치 윤희의 내적인 혼란과 동요를 드러내는 움직임처럼 보인다. 앞을 향해 걸어가다가 윤희는 문득 철로로 은유되는 자신의 삶을 처음으로 돌아보게 된다. 나는 누구이고 지금 어디에 있는가 싶은 황망한 그의 표정은 앞으로 맞이할 삶의 새로운 국면과 대비된다.
참고문헌
[1] 주유신, 「퀴어 정치학과 영화적 재현의 문제: <지상만가(김희철, 1997)>를 중심으로」, 『영상예술연구』 (16), 2010, p.133.
[2] 리처드 다이어 지음,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전형적으로 게이를 재현하는데 따르는 몇 가지 문제」, 『호모 punk 异般: 레즈비언, 게이, 퀴어영화비평의 이해』, 김선아 옮김, 큰사람, 1999, p.200~218.
[3] 서인숙, 「여성의 주체성과 그 영화적 재현: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영화연구』 (16), 2001, pp. 36~37.
[4] 바바라 해머 외 지음 , 『호모 punk 异般: 레즈비언, 게이, 퀴어영화비평의 이해』, 주진숙 외 옮김, 큰사람, 1999, p,52.
[5] ‘윤희에게’ 감독 “한국-일본 여성 연대를 보여주려 했다”, <오마이뉴스>, 2019년 11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