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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수집가 Jun 10. 2020

윤희들에게 부치는 편지 ②

영화 <윤희에게>


쌓여가는 눈과 차오르는 만월처럼


<윤희에게>는 다양한 메타포가 등장한다. 그중 ‘달’은 영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국에서의 달이 초승달이었다면 여행을 떠난 일본에서의 달은 만월이 된다. 마사코 고모가 올려다보는 달, 윤희와 새봄이 올려다보는 달, 그리고 새봄이 20년 만에 재회한 윤희와 쥰을 멀리서 지켜보고 돌아가는 길에 올려다보는 달까지. 차오름의 순간마다 카메라는 달을 클로즈업해서 관객에게 보여준다. 이는 초승달에서 보름달이 되어가듯 서서히 원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달처럼 윤희가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의미와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차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차오르기도 하고 다시 사라지기도 하는 모습이 삶의 속성과 닮았고, 멜로보다는 두 사람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영화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작단계에서 영화 제목이 ‘만월(Moonlit Winter)’이었던 만큼 그 메타포의 중요성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한 인터뷰에서 임대형 감독은 “영화 속 달은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 메타포(은유)”라고 언급한 바 있다.


쥰과 그의 고모가 사는 홋카이도현의 오타루는 눈과 달, 밤과 고요뿐인 도시이다. 이곳의 눈은 치우면 내리고 또 내린다. 그래서 그들은 입버릇처럼 눈을 치우면서 말한다.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라고. 눈의 자리에 그리움을 넣을 수 있다면, 그것이 영영 그치지 않을 것 같은 서로에 대한 그리움이라면 어떨까. 난생처음으로 어딘지 무척 소중한 곳에 도착한 느낌, 이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원히 나이기를 바라는 마음, 모든 신경과 말단과 감정이 멍들고 짓밟히고 으스러졌던 기분. 윤희는 이 모든 시간을 떠올리면서 잃어버린 시절과 상처를 회복하기 위한 여정을 떠나왔다. 그리하여 하얀 눈으로 뒤덮인 오타루의 풍경은 건조하고 차갑게 살아왔던 두 사람에 대한 강렬한 메타포가 된다. 아울러 두 사람의 만남을 기점으로 무채색의 풍경은 조금씩 다채로워진다. 건조한 윤희가 점점 색을 입듯 집 안의 색감이나 인물의 의상도 무채색에서 점점 원색이 들어간다. 오랜 시간 겨울을 살아내고 새로운 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윤희에게 용기를 주는 빛과 같다.



한편 이 영화는 성장 로드무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윤희는 새봄과 계획에 없던 일본 여행을 떠나게 되면서 서로를 통해 몰랐던 모습들을 발견한다. 그 과정에서 새봄은 부모 세대를 이해하게 되고, 윤희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가령 새봄은 윤희의 카메라로 사진을 찍다가 그 카메라의 사연을 알게 된다. 카메라를 통해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며 이해하게 되는 것은 카메라와 영화가 대치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면서 디테일하게 알아가는 타인의 삶처럼 카메라에 서로의 모습을 담아내는 윤희와 새봄은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특히 새봄을 찍고서 미소를 머금는 윤희의 모습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사랑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되는 ‘나’이다. 자연스럽게 영화 전반은 오버더숄더쇼트로 이루어진 대화 장면이 주를 이룬다. 특히 여행 초반에는 쇼트/역쇼트 테크닉을 통해 두 인물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을 강조했다면, 여행이 끝나갈수록 오버더숄더쇼트의 빈도가 잦아진다. 상대방의 시선을 받아주는 뒷모습은 두 사람의 가까워진 심리적 거리감을 말해준다.


이윽고 20년 만에 만난 윤희와 쥰의 일렁이는 눈동자를 기억한다. “윤희니?”라는 쥰의 부름에 걸음을 멈추고 윤희는 가만히 서서 바라본다. 카메라는 클로즈업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보여준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시울이 붉어지는 시선만으로 지난 세월이 설명되는 순간이었다. 깊이 사랑했지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며 그리워하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던 두 사람의 감정을 보여주는 그 장면만큼은 며칠 동안 잊히지 않았다. 시계탑 앞에서의 마주침과 운하를 걷는 뒷모습, 단 두 장면으로 플롯의 절정부는 매우 짧게 처리된다. 두 사람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끝으로 화면은 페이드 아웃되면서 눈을 밟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초반부터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견디며 삶을 함께 쌓아왔기 때문에 그들의 만남이 꿈처럼 느껴진다. 만남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왜 꿈에서만 함께할 수 있었을까. 유예된 사랑과 상처, 쌓여가는 눈과 같은 그리움과 만월처럼 차오르는 벅찬 만남. 꿈 같은 만남을 뒤로한 채 윤희는 새봄과 함께 일상으로 돌아간다.




윤희들에게 부치는 편지


오타루 여행을 전후로 인물들의 행동과 장면 배치는 대구를 이룬다. 영화 초반에 새봄이 삼촌의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고 아빠를 만나는 과정이 후반부에서는 윤희가 사진을 찍고 남편을 만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초반에 쥰이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가부장제로부터 비로소 벗어난 것과 후반에 오빠에게 작별을 고하는 장면이 그 예이다. 정확하게 닫힌 메타포는 윤희와 쥰, 윤희와 새봄의 삶이 다르면서도 비슷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억압을 받으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회복하고 온 윤희는 새봄과 새출발을 한다. 오빠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생계를 꾸려가려는 노력이고, 그런 모습을 딸에게 보여주는 것은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새봄 또한 윤희에게 또 다른 ‘새로운 봄’을 선물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는 새봄의 엄마가 아닌 ‘윤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리라. 새 삶으로 나아가는 회복과 복원의 서사는 “인간이 자신을 억압하는 시스템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엄을 찾아가는 과정”[1]이다.



쥰아. 나는 나한테 주어진 여분의 삶이 벌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동안 스스로에게 벌을 주면서 살았던 것 같아.
너는 네가 부끄럽지 않다고 했지.
나도 더 이상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영화는 사랑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타인을 사랑하는 일은 엄청난 용기가 동반할 때가 있다. 어떤 이는 남들보다 더 많은 용기를 내야 할지도 모른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기쁨의 나날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의 기쁨은 그 사람의 발견만이 아니다. 그건 내 안에 들어 있던 나도 몰랐던 나들의 발견이다. 세상에, 내 안에 이런 비밀스러운 부드러움이 있었다니, 이런 다정함, 이런 친절함, 이런 예민함, 이런 애착과 기쁨이 있었다니······." 반대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의 발견일지도 모른다.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을 통과해 온 그 사람의 지난 모습까지 남김없이 알고 싶은 마음, 서로를 알아가면서 발견하게 되는 사실들을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마음, 그 사람의 그림자까지도 눈에 담아내려는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고 싶다. 사랑을 매개로 당신과 자기 자신을 알아가려는 ‘용기’를 낸 모든 윤희들에게 <윤희에게>라는 편지를 부치고 싶다.



참고문헌

[1] <윤희에게> 임대형 감독 - 오타루에서 윤희가 코트를 입은 이유는, <씨네21>, 2020년 3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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