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TSD와 회복탄력성

가까스로 나아질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으면서.

이틀 전, 앞으로 두 달 가까이 진행될 상담에 들어가기에 앞서 초기 상담을 받았다. 3시간 넘게 진행되었던 검사 중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관련한 검사지도 작성했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요즘 느꼈던 일상 속 이물감이 바로 PTSD 증상이었다는 것을. 스트레스에 노출된 뒤 정서반응의 마비, 멍한 상태, 비현실감, 불면, 집중력 저하 등의 증상이 1개월 이상 지속되면 PTSD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모든 증상을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새벽까지 적나라하게 느끼며 지내고 있다. 회복탄력성을 운운하기에 아직은 너무 이른 감이 있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이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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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쉬지를 못한다. 정신이든 몸이든 쉬지를 못한다. 쉴 틈 없이 생각에 빠지고 또 빠지기를 반복한다. 스스로를 방치하지 않기 위해 씻고 카페로 나가서 과제라도, 새로운 프로젝트 회의라도, 뭐라도 해봤다. 그래도 머리가 좀처럼 돌아가지 않는 멍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상대방과 대화를 나눌 때도 오래 집중하지 못했다. 어제 만났던 친구 앞에서는 중언부언했다. 책은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식욕이 줄어서 수시로 밥을 걸렀다. 한 달이 지난 지금, 여전히 늦은 시간까지 잠을 못 잔다. 꾸역꾸역 살다 보니 가을이 되었는데 어쩌면 올해는 9월까지 생존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올해 초에도 이 정도로 고통스러웠던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비슷했겠지. 아마도.​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현실, 그리고 지금까지 읽고 접했던 책과 기사들을 그저 남의 일로 치부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나의 일이 된 이제서야 뒤늦게 모든 일이 피부로 와닿는 게 참 싫었다. 사회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분노했던 게 위선처럼 느껴졌다. 길어봐야 하루 이틀 만에 잊어버렸으니까. 누군가는 하루 이틀 이상으로 고통받는다는 걸 쉽게 잊어버렸으니까. 기나긴 싸움의 과정이 혹독하게 느껴진다. 갖은 폭력과 범죄에 노출되는 것도 모자라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 가혹하게 느껴진다.​

나의 성장과 어른됨의 과정이 아프다. 예전 같으면 속상해서 눈물이 났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무덤덤하다. 폭력에 무뎌질수록, 상처를 받을수록 이상하게 눈물이 잘 나지 않는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는 안 볼 생각으로 외면하게 된다. 애초에 자기 일처럼 생각해보지 않았겠지. 입 밖으로 꺼내면 그게 말이 되고 사과가 되는 줄 알겠지. 생각이 깊어질수록 큰 결정을 앞두고 많은 부분을 고려하게 된다. 쉽게 결정을 내리기에는 무게가 절대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잘못하지 않은 사람이 이런 고민을 하면서 잠 못 드는 게 현실이다. 잘못한 사람의 일상은 흔들리지 않는다. 당신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지 못했던 한 해였다. 당분간 나의 영역에 함부로 사람을 들이지 못할 것 같다. 쉽게 시간을 내어주지도, 약속을 하지도, 부탁을 들어주지도, 마음을 주지도 못할 것 같다. 여러 사정과 변명과 이야기를 들어줄 인내심도 바닥이 났다. 그러니 나를 위해서라도 잠시 쉬어야겠다. 일단은 쉬어야겠다. 가까스로 나아질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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