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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지프킴 Aug 13. 2021

내 나이 서른의 '행복론'

"너 자신을 알라"와 시지프 신화



공자는 서른 살의 자기를 '중심이 바로 선'(而立, 이립) 상태로 정의했다.

중심이 바로 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아마도 그것은...

요람에서 거리로 나아가 세상의 풍파와 냉혹함을 둘러보고,

따뜻하고 좋은 것부터 잔인하고 서글픈 것까지 느껴도 보고,

나름 인생의 단맛 쓴맛 신맛 매운맛 오감으로 자신을 둘러싼 시대적 공간적 제약들을 다 돌아본 다음에,

세상의 단면과 세상이 돌아가는 메커니즘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이해하여

어떤 커다란 신념 내지는 가치관부터 작고 세세한 의사결정 원칙까지 바로 세웠음을 의미한 것이리라.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설령 어딘가 대문호의 작가노트 같은 곳에 기록된다 하더라도 한동안 구석에 처박혀 주목을 받지 않는 것들.

그러나 역사의 겉포장지에는 드러나지 않더라도 그 안의 현실 속 메커니즘을 내밀히 관찰해낸 사람들은 늘 있었다.

 

세상이 작동하고 인간이 행동하는 방식의 대부분은 교과서 속 한 문장처럼 이상적으로만 굴러가진 않는다.

내로남불이 되고 견물생심이 발하고 팔이 안으로 굽는 인간의 욕망과 본성,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러진 인간 사회와 집단을 이해하려고 하는 전 생애에 걸친 과정...

짧게 말하면 인간을 이해하려는 시도, '인문학적 관찰'이 뒷받침된 지혜가 지성인들의 무기였음이리라.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인문학적으로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인간은 크게 두 부류가 있다.

세상을 늘 '이렇게 되어야 한다'로 마음먹고사는 사람과,

세상은 늘 '원래 이런 방식으로 굴러간다'라고 알고 사는 사람이다.

 

전자 중에는 휴머니즘을 갖추고 세상의 불합리함에 투쟁하며 보람과 의미를 찾는 숭고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기 자신마저 말과 행동이 다르고 스스로를 속이는 위선에 짓눌려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후자 중에는 정글의 한 짐승처럼 강약약강의 얄미운 짓을 일삼는 무리도 있거니와, 반대로 세상의 혁신을 주도하는 파레토 법칙의 그 '20퍼센트'가 되는 것에 자부심을 갖는 부류도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제각각이 하나의 우주이고 세계이고, 그렇기 때문에 제각기 다르다.

MBTI의 16가지 중 하나로 내 모든 자아를 다 대변할 수 없고, 저마다의 고유한 스토리와 히스토리가 있기 마련이듯이.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모른 채로 죽는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는 채로 세상에 내던져지니 어쩌면 스스로를 모른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삶을 살아가면서 세계와 대면하고 투쟁하고 타협하면서,

이따금 다른 사람들과 어울렸다가 헤어졌다가 하면서,

우리는 그저 만들어지기만 할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자기 자신을 지각(知覺)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이것이 누구나 원하는 '행복한 삶'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 폴 부르제




저 두 부류의 인간들의 모습은 사실 삼라만상으로 다양하다.

어쨌거나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은 부류를 막론하고 공통점이 있다.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에서 밝혔듯, 불행함은 저마다 제각각의 모습으로 불행하지만 행복함에 이르는 길은 비슷비슷하니까.

서른의 지금, 나는 행복으로 가는 문의 열쇠를 찾아냈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 그리고 그에 맞는 스타일을 추구하고 행하며 사는 것,

그러기 위해서 늘 균형감각과 중용의 자세를 잃지 않는 것


이 열쇠는 쉬이 얻어낸 것이 아니다.

세상의 빨간색부터 보라색까지 그리고 밑바닥부터 가장 위까지 다양한 경험을 하고,

동서고금에서 똑같이 고민했었던 주제들을 다룬 수많은 고전을 읽고,

예술가들의 발자취와 인생사를 들여다보고,

내가 속했던 모든 곳에서 주변 사람들을 존중하며 관계를 맺어갔으며,

모든 상처와 고통마저도 끌어안고 그 안에서 배움을 발견하려고 했기 때문에 얻은 열쇠다.


자기 자신을 안다는 말 한 마디 속에는 너무나도 많은 게 들어있다.

사람도 매일매일 하루를 살아가며 한 겹 한 겹 나이테를 두르기 때문에 알았다는 순간에도 스스로를 다 알았다고 결론지을 수 없고, 객관적으로 메타인지할 수 있는 지성과, 자신의 약점과 상처까지도 솔직하게 대면할 수 있을 만큼의 용기도 포함하니까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명언 ‘너 자신을 알라’는 그 말 속에는

알고 나면 다 됐다’가 아니라

알려고 한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 알기 위해 알아보기를 멈추지 마라’를 내포하고 있다.


의식은 화살같다. 날아가는 화살을 쫓지만 여깄다고 말하는 순간 이미 더 멀어져가는 화살.

스스로를 알아보려는 인간의 의식은 그 관측의 행위로 인해 이미 관측하기 전 상태보다 한 뼘 성장해 있고 변화해 있다.

이것은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연상시킨다. 관측의 행위 자체가 결과를 바꿔버리는 것 말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다. 우리 스스로를 알아보려는 이 관측의 행위 자체가 결국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다.




시지프는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로부터 굴러떨어진 바위를 산꼭대기에 올려놓지만 다시 떨어지는 무한 굴레의 형벌을 받는다. 우리 인생은 시지프를 닮아 있다.

시지프가 산꼭대기에 바위를 올려놓는다는 ‘결과’만 주목한다면 그의 삶은 한 가지 정답뿐이고 그마저도 공허하게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바위를 굴려 올리는 그 행위와 과정 자체에 주목한다면, 그의 삶은 다채로워지고 역설적으로 바위를 굴려 올리는 그 고통이 행복한 일이 될 수 있다.

그 바위를 굴리는 모습, 방법, 경로, 속도는 모두 다를 수 있다. 반복되는 바위 올리기 속에서 우리는 삶의 면면마다 매 번 다르게 굴려가며 그럼으로써 매 번 다르게 우리 자신을 만나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던 ‘너 자신을 알’기 위한 고독한 수행의 길이 시지프의 바위와 맞닿아 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행위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은 때때로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이미 타인을 다 알고 자신을 다 알았다는 듯 오만함을 입고서 세상에 내팽겨쳐진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서로를 못 알아보고 진흙탕에서 뒹굴 것이다.

반면 세상은 물론 나 자신도 알지 못한다는 무지를 인정하고 그렇기에 알려고 노력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은 각자가 짊어진 바위들과 함께 행복의 산을 함께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바위를 밀어올리며 나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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