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시대 속 '아름다움'이 주는 안정감
(Coverd Photo by averie woodard on Unsplash)
삶을 정의하는 수많은 개념 중, ‘나’에게 꼭 들어맞는 정답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 이나 될까. 100%의 확신을 가진 삶이란 환상에 가깝지만, 가질 수 없음에도 추구하게 되는 건, 아마도 사람의 마음이 불확실을 견디기엔 다소 유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높은 확률로 그럴듯한 무언가를 취득함으로써 불안을 퇴치한다. 내려놓기, 내면 비우기, ‘나답게' 살기 등.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조용한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는 선언 역시, 어느 순간 트렌드의 연장선 위에 놓인 데코레이션이 되어버리곤 한다.
명예, 돈, 권력, 내적 만족, 혹은 외적 완벽함. 이중 나의 불안을 잠재워 줄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무엇일까.
그보다 앞서, 우리는 지금 무엇 앞에서 불안을 느끼고 있는 걸까.
이름 모를 안정감에 대하여
안정감이란 상당히 주관적이고 감상적인 단어이다. 태어나 성인이 되어 생을 마감하기까지 정답도, 해답도 없는 이름 모를 것에 대한 막연한 추구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형태와 무게, 그 농도에 차이가 있을 뿐,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생명체는 그것을 원한다. 안정감, 더 나아가 안전함을.
오늘도 세상은 소란스럽다. 정치적 대립, 물가 상승, 사회 계급과 그 속에서 파생되는 갈등, 종교와 이념의 충돌 등 하루가 멀다 하고 수만 가지 이슈가 쏟아져 나온다. 그럼에도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입고, 소소하게 웃으며, 때론 귀엽고 무해한 것들을 보면서 마음을 달랜다.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린 살아있으니까.
그중 외모에서 비롯된 안정감은 여타 다른 조건 보다 제법 빠르고 유용하다. 거울을 볼 때 느껴지는 만족감, 혹은 나를 향한 타인의 호의적이고 따뜻한 시선이 만들어 낸 사회적 힘은 곧 자기 효능감으로 이어진다. 나의 말과 행동이 이물감 없이 자연스레 타인에게 받아들여지고,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환대를 받는다는 것. 이 얼마나 매혹적인 일인가.
우리는 원하던 원치 않던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무인도에 갇히거나 종말 뒤 세상에 홀로 남지 않는 이상 혼자 살아갈 수는 없다. 참 피곤한 일이지만, 타인을 의식하는 만큼 우리는 자연스럽게 스스로 비교 우위(Comparative Advantage)에 서길 원하게 된다. 물론 개인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남 보다 열세하기를 원하는 사람을 찾긴 힘들 듯하다.
‘아름다움'이란 진통제
‘매력적이다’
‘아름답다’
이러한 평가는 생각보다 쉽게 우리의 마음을 녹인다. 비록 기대한 적 없더라도, 뜻밖의 칭찬은 왠지 모를 간지러운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잠시 잠깐 마음속의 불안을 잊게 할 힘이 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 힘을 습득해 왔다.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사회적 기준에 부합한 ‘예쁜’ 외모가 얼마만큼의 강력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지 충분히 학습해 왔을 것이다. 매우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힘을 갖는 것만큼 불안 퇴치에 효과적인 대안도 잘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조금 더 안전하기 위해, 혹은 조금 덜 불안하기 위해 사람들은 쇼핑 카트를 채우고, 피부과를 예약하고, 운동을 하고 식욕 억제제를 처방받는다. 잘 가꾸어진 머릿결, 잡티 없이 말간 얼굴, 관리한 티가 나는 몸, 구김 없고 질 좋은 옷. 이는 곧 불안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매일의 전투를 치뤄내기 위한 값비싼 진통제, 전투 장비들이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인생이란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라며 인간의 자기 주도성을 강조한다. 오늘날의 세상은 종종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자기만족을 강조하지만, 결국 그것도 잘 가꾸어진 하나의 개념임을 염두에 둔다면, 그래.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지금, 당신은 아름답나요?
‘아름다움’은 소유보다 추구에 가깝다. 인간이 평생에 걸쳐 갈망하게 만드는 것, 변하고 또 변하는 것. 시대에 맞게 형태를 달리 하는 ‘아름다움’의 가치는 싫든 좋든 모든 세대의 인간들을 간섭한다. 쫓기는 누군가는 불편할 것이고, 쫓는 이들은 조급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온전히 그것을 갖고 만족할 수 있을까. 그 보다 사실, 그건 우리가 어디에서 경주를 멈추느냐에 달린 것은 아닐까.
특정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도 누군가에겐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 젊은 날을 불태우는 청년들을 향한 노인의 시각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 세대를 걸쳐 반복되는 이 추구의 행렬은 단순히 좋고 나쁜, 해롭거나 유익한 등의 흑백논리로 구분 짓긴 어려운 현상일 것이다. 어쩌면, 판단의 대상이 아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본능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우리는 주어진 하루를 살아간다. 타인과의 크고 작은 만남, 스쳐 지나가는 이름 모를 사람들, 나를 둘러싼 여러 모양의 공동체와 사회. 지금 당신이 위치 한 그 자리, 그곳에서, 당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혹시, 자신을 마주하고 평가하는 것 자체로도 소극적이고 부정적이진 않은가.
‘지금, 당신은 아름답나요?’
이 질문 앞에 우리는 어떤 답을 떠올릴 수 있을까. 지금 당신이 떠올린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리고 만약, 당신이 스스로를 충분히 아름답다 여기게 된다면, 그땐 과연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