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은 뒤팽과 홈즈 사이를 이을 수 있는가
미스테리아 26호 - 엘릭시르
살인의 가장 큰 이유는 그저 라스콜리니코프 자신의 절대적인 자기애에서 비롯됐다.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스스로에게 입증하기 위해 첫 번째 살인을 저질렀고, 목격자를 죽임으로써 나를 살린다는 보존 본능에만 충실한 두 번째 살인까지 감행했다. 오로지 '나만 살겠다'는 욕망에 충실한, 그 어떤 이론이나 미사여구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이기적인 싸구려 범죄. 그나마 다행인 건 라스콜리니코프 자신도 그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 p. 107. 살인자의 고백록 - 표트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김용언
- 미스테리 속의 어머니, 그리고 변화
. 나쁜 '어머니'의 처벌 vs 환상에서 벗어난 모성
- 데니스 루헤인의 '가라, 아이야, 가라'와 에이미 몰로이의 '퍼펙트 마더'
. 잡아죽여야 할 흉녀인가, 부조리한 전근대적 가정의 최약자인가
- 장화홍련의 계모를 재구성하다
. 그래도, 어미는 아이를 지켜야 한다
- 윤여정의 '어미'에서 오로라 공주를 거쳐, 미씽과 세븐데이즈까지.
- 그리고 약간은 다른 복수의 형태. '친절한 금자씨', '밀양'
- 리뷰들
. "두 번 이상의 반전, 인상적인 복선, 강렬한 마무리"를 모두 충족하는 이상적인 미스테리 단편
- 와카타케 나나미, '조용한 무더위'
. "부정과 부정이 뒤얽히는 사회에 이미 전통적인 선악은 없다. '모두가 공범'일 뿐이다."
- 알리사 가니에바. '상처받은 영혼들'
- 또 하나의 미싱링크 후보를 찾아서
. '죄와 벌'은 과연 모르그 가의 살인과 주홍색 글씨 사이를 이을 수 있을까
- 뒤팽과 홈즈와 포르피리. 그리고 검은 고양이의 '나'와 라스콜리니코프의 대조
. 죄와 벌을 읽고 있자면 항상 이 위대한 소설을 뒤팽과 홈즈 사이의 추리소설 계보 어딘가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범죄를 저지르고 괴로워하는 라스콜리니코프는 추리소설에 나오는 범죄자들의 병든 심리를 보여주는 교보재 같은 인물이고, 관찰과 논리, 심리분석을 고루 활용하며 라스콜리니코프를 몰아넣는 예심판사 포르피리는 크리스티 여사의 소설 한두편 정도에 슬쩍 등장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인물이다. 실제 포르피리가 라스콜리니코프를 범인으로 지목하며 어차피 당신은 도망도 못갈테니 기왕 자살할거면 수기라도 좀 남겨서 억울한 사람이나 구해보라고 느물느물 웃으며 비수를 꽂아버리는 부분에서 크리스티 여사의 유명한 걸작을 떠올리는 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 그러나 추리소설의 역사를 다룬 가장 대표적인 책인 '블러디 머더'의 저자 줄리언 시먼스는 죄와 벌에 대한 그녀의 글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추리를 단지 도구로 사용했을 뿐이며 라스콜리니코프가 무릎을 꿇은 건 포르피리의 추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죄의식과 영적인 깨달음에 의한 것이었을 뿐이라고 굳이(?) 거리를 둔다. 여기에 그의 살인 역시도 잘 짜여진 계획과 트릭에 의한 것이라기보단 우연에 우연이 겹쳐져서 도리어 그의 등을 떠밀었을 뿐이니까.
. 하지만 그렇더라도 도스트예프스키의 소설은 범죄자를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보고 그 외면과 내면을 샅샅이 묘사한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후대의 코난 도일이나 모리스 르블랑보다 더 에드거 앨런 포가 그려냈던 추리소설의 모습을 계승한 느낌이다. 사실 도일과 르블랑은 홈즈와 뤼팽이라는 히어로로서의 매력을 가진 탐정을 만들어내는데는 성공했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범죄자는 대부분 평면적이고 피상적이다 - 솔직히 짤막한 단편 하나에 나와서 홈즈와 허세 가득한 대화 몇 마디 하고 허무하게 사라지는 모리아티가 왜 그렇게 인기가 있는건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차라리 빌런으로 따지자면 '얼룩 끈'에 나오는 로일롯 박사가 더 인상적이지 않나). 범죄자들이 다시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애거서 크리스티를 기다려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 추리소설들에 대한 아쉬움을 담아 도스토예프스키가 꾸준히 거론되는 것일 거고.
. 이렇듯 이번 미스테리아 26호에서는 죄와 벌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소설이 가진 미스테리 요소를 이야기한다. 범죄와 해결이 있고, 이를 추리를 통해 풀어나가는 부분이 있으며, 범인과 탐정의 인간상을 묘사한 점에선 죄와 벌 역시 에드거 앨런 포와 코난 도일 사이에 존재하는 수십년 간의 미싱링크를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기에 이를 다룬 이번 기사는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다만 굳이 하나 아쉬운 점을 꼽자면 죄와 벌을 이야기하면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혀 예측할 수 없던 범행의 진상과, 진실과는 전혀 다른 논리에 기초해서도 진실에 이를 수 있다는 탁월한 아이러니를 보여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최고최대의 추리물(?!)일텐데. :)
와카타케 나나미는 이상적인 미스테리 단편의 세 가지 요소를 다음과 같이 거론했다고 한다. "첫째. 적어도 두 번 이상의 반전. 둘째, 독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인상적인 복선. 셋째, 강렬한 마무리." '조용한 무더위'에 수록된 여섯 편의 단편은 이 요소를 모두 충족한다. 무엇을 예측하건 마지막에는 한 방 맞은 기분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읽어갈수록 안락의자 추리에서 액션까지 모두 소화하는, 그러나 삐거덕거리는 몸 때문에 이제 좀 힘겨워보이는 하무라 아키라를 전심으로 응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p. 86. 취미는 독서, '조용한 무더위' - 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