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명 - 애거서 크리스티(해문) ●●●●●●●○○○
"상관이 있는 사람은 죄가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죄가 없는 사람이라고요."
"왜 오신거죠? 도대체 여길 왜 오셨나고요?"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를 이해할 수가 없군요. 오빠의 누명이 벗겨지는 걸 원치 않는단 말입니까? 그가 정의의 혜택을 받는 걸 원치 않는단 말입니까?"
"오, 정의라고요!" 그녀의 말은 내뱉는 것 같았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이렇게 하시는 건 정의가 아니에요! 그게 지금 오빠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죠? 오빠는 죽었어요. 상관이 있는 사람은 오빠가 아니에요. 바로 우리라고요!"
"무슨 말인가요?"
"상관이 있는 사람은 죄가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죄가 없는 사람이라고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살을 파고들기라도 하려는 듯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상관 있는 사람은 바로 우리에요. 선생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했는지 모르시겠어요?"
- p. 36.
. 양어머니를 죽인 죄로 종신형을 받고 병으로 죽은 아들. 이미 때가 늦긴 했지만, 사실은 그가 무죄였다는 한 남자의 고백. 하지만 아들이자, 오빠이자, 동생의 무죄가 입증되었음에도 아무도 기뻐하지 않고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으며, 아무도 그를 위해 애도하지 않는다.
. 생각해보면 크리스티 여사의 강점이라고 내세울만한 부분 중 상당수가 빠진 이야기다. 포와로나 마플 양, 토미-터펜스 부부나 올리버 부인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여사 특유의 유머러스함도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그렇다고 트릭이 훌륭한 것도 아니고, 구성에 있어서도 앞부분에서는 힌트를 너무 아끼는 바람에 도저히 범인이 누군지 짐작할 수 없고, 반대로 뒷부분에서는 힌트를 너무 퍼주는 바람에 범인이 누구인지 모를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은 크리스티 여사의 다른 책들과 구별되는 뚜렷한 강점을 가진다. 관계와 심리 -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드라마가 그것이다.
. 한 사람이 숭고한 이상과 그 이상을 실현시키기에 충분하고 남는 돈을 가지고 가족을 만들고 어머니가 되려 했다. 하지만 사랑보다는 이상이 더 컸던 것이 문제였는지, 그들은 결국 가족이 되지 못했다. 누군가는 지금의 비참함을 벗어나 빛나는 세계로 들어오기 위한 계산적인 속내를 가지고, 누군가는 부모에게 팔려서 강제로 가족이 된다. 별 생각이 없는 사람도, 자기 스스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서로 다른 마음들은 묶여지지 않고, 가족도 아니고 남도 아닌 기묘한 거리감을 유지하게 된다. 그런 그들을 한데 묶는 건 많은 돈과 - 그에서 나오는 그녀의 영향력 뿐이었다.
"믿을 수 없어!" 맥매스터가 말했다. "자네는 자네가 마시는 커피 속의 쓴 맛이 정말 커피만의 맛일까 의심할 거고, 벽난로 옆에 세워 둔 부지깽이가 너무 크고 단단하다고 생각하게 될 걸세. 그리고 그녀는 자네의 그런 생각을 알게 될 거고 말이야. 그럴 수는 없어."
- p. 133.
. 그런 뒤틀린 관계가 한순간에 파국을 맞았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그 파국을 통해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고 서로간의 거리를 재설정하며, 매끄럽지는 않을지언정 그들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새로운 관계를 쌓아나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좀 더 주어졌다면 비록 완벽하지는 않아도 시간의 힘을 빌어 어떤 형태의 유대가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그들 앞에 나타난 진실은 그들을 그렇게 놓아두지 않는다. 우리 중 하나는 끔찍한 살인자야. 그 순간부터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서 죽은 아들에게 찍혔던 낙인은 오밀조밀한 거미줄처럼 남은 가족들 개개인을 향해 뻗어나간다. 비극 앞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슬픔 위에서 관계를 쌓아나가던 이들의 노력은 무너져내린다. 이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범인을 지목하는 수밖에 없다.
. 참 특이한 추리소설이다. 이 소설은 트릭과 추리로 범인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독백 속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을 통해 범인을 찾아내야 한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차례로 포커스를 맞추고, 그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연극배우처럼 차례차례 독백을 해나간다. 주의깊게 그 독백을 듣고 있다보면, 어렴풋이 그들이 말하는 속마음의 수위가 조금씩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누군가는 자신이 누구인지 깊게 털어놓기도 하고 누군가는 계속 이야기의 초점을 바꿔가면서 자신의 말에 진심이 드러나지 않도록 마음을 숨기려 한다. 과연, 그 미묘한 차이를 읽어낼 수 있을까.
"제 말은 그가 살인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습니까? 그는 살인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는 할 수가 없었어요. 여러 가지 상황이 이상하게 얽혀서 그에게 불리하게 되지만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었을 겁니다. 저는 그가 무죄였다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다."
"선생이요?"
"제가 바로 그 차를 몰던 사람이었으니까요."
- p. 26.